레이블이 이민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이민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8년 10월 15일 월요일

벌써 5년... 그 다음 5년을 향해.

요즘 제 삶에 새로운 중장기 목표를 수립하지 못해 다소 목적의식 없이 그저 시간을 흘려 보내던 중, 목표수립 이전까지 잠시 쉬어가는 코너로 수립한 저의 단기 목표가 있습니다.

바로 외발 자전거 타기!

그래서 며칠 전 인터넷 쇼핑을 통해 외발 자전거 한 대를 주문 했습니다.



외발 자전거 타는 법 관련해 구글링을 하다보니 대략 15시간 정도 연습을 하면 어느정도 탈 수 있다고 해서, 눈/비 오는 날이나 어쩌다 연습을 거르는 날 등을 고려해 매일 30분씩 연습하여 올 해 말일까지는 외발 자전거를 타는 것으로 목표를 정해서 연습 중이죠. 물론 이 목표보다는 덜 재미있지만 훨씬 중요한 것은 연말까지 다음 5개년 계획 목표를 수립하는 것이겠지요.

보통 퇴근하고 저녁식사를 마친 후, 일몰 이후에 집 앞 drive way에서 연습을 했는데, 지난 주말에는 한낮에 연습을 했습니다. 여느 때 처럼 열심히 구르고 넘어지고 까지며 연습을 하다 잠시 쉬고있는데, 차량 한 대가 저희 집앞에 멈췄습니다. 뭔가 싶어서 쳐다보니, 아이들이 외발자전거 타는거 보고싶다고 해서 잠시 보려고 멈췄답니다.

저는 이거 며칠 전에 사서 아직 못탄다는 말과 함께 미처 패달이 2바퀴도 돌기 전에 뒤로 나자빠짐을 시연해 보임으로서 제 말이 거짓이 아님을 과감히 증명해 보였죠.

"굳럭!"

이 말을 남기고 그 차는 떠나갔습니다.

욱신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그만둘지, 더 연습할지를 고민하던 찰나,

"띠링"

핸드폰에 알림이 떴습니다. 

구글 포토에서 5년전 오늘 어떤 사진을 찍었는지 알려주는데, 평소에 보이는 아아들 사진이 아닌, 건물 사진 한 장만 달랑 보이네요.


사진을 딱히 좋아하지 않기에 아이들 사진 외에는 잘 찍지도 않는 제가 건물 사진을 찍었다는 것은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캘린더와 당시 저의 SNS를 찾아보니 5년 전 오늘이 한국에서 저의 사표 결재프로세스가 모두 완료되어 퇴직일이 확정이 되었던 날이며, 그간 같이 지냈던 다른 분들께 곧 퇴직한다는 인사를 뿌린 날이더군요.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8년을 보낸 곳이기에 괜시리 센치해져 사업장 밖에서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건물 사진을 남겼던 것 같습니다.

이 날로부터 8년 전, 신입사원 때만 해도 저는 이 회사에서 평생 일을 할 줄 알았습니다. 아니 신입사원 시절까지 시계를 돌리지 않더라도, 그 해 3월에도 제가 이 회사를 떠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죠.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얼마 안되는 것이지만 손에 쥔 것을 놓기 싫어 이직조차 마다했었고 강인한 성품을 지니지 못해 이것 저것 재고 또 비교하면서 타이밍을 놓치기에 도가 튼 제가 부서 이동도 아니고, 한국 내 이직도 아닌 이민을 결정에서 실행까지 단 반년만에 끝내버렸습니다. 4월달부터 시작된 제 커리어에 대한 고민은 5월이 되자 이민으로 변했고, 6월에는 캐나다라는 대상 국가가 확정되었으며, 7-8월에는 이민을 위해 영어 공부했고 9월 IELTS를 3차례 연속으로 치뤘고, 필요한 성적이 나오자 11월에 퇴직을 한 후, 12월에 캐나다로 왔습니다.

이 때엔 

'한창 왕성한 경제활동이 필요한 지금 나이에...'

'혼자도 아닌 처자식을 데리고...'

'집도 절도 없는데...'

'말도 잘 안통하는데...'

'한국에서도 해내지 못했으면서 하물며 캐나다에 가서 5년간 손 놓았던 일을 다시 하는게 맞는 선택이기는 한 것인지...' 

등등 정말 수 많은 고민과 걱정과 근심들로 가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제 삶과 커리어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과 숙제들을 가지고 살지만, 이 때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행복한 고민들 뿐 이군요.

하지만, 이민 고민부터 실행까지 타임라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 때에 저는 충분히 조사하고 준비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다소 무모한 돈키호테식 결정 덕분에 "무식하면 용감"해졌고, 그래서 캐나다까지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저의 성향상, 제가 지금 알고있는 것들을 5년 전에도 알고 있었다면 아마도 그냥 한국에서 계속 직장을 다녔을 것입니다. 
저의 지난 5년은 좋은 기회들과 행운들이 말 그대로 우연히 연속되면서. 자칫 한걸음만 삐끗 해도 떨어질 수 있는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은 이민에서 실력/언어/재력/지식/경험 무엇하나 빼어난 것이 없는 제가 이만큼 전진할 수 있었는데, 이런 우연들이 언제나 찾아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5년 전 계획들이 정말 많은 행운과 우연들로 인해 이뤄졌다면, 다음 5개년 계획들은 더 많은 준비와 노력을 통해 저의 땀으로 이뤄내고 싶습니다. 지금 시도중인 외발자전거 타기는 어쩌면 그 과정 중에는 구르고 넘어지고 깨진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하는 노력은 결국에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제 스스로에게 보여주기 위한 작은 증명이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2018년 10월 8일 월요일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

제가 종종 드나드는 인터넷 카페에 어떤 회원께서 이 속담관련 글을 남기셨는데, 이를 읽고 갑자기 옛 학창시절 추억이 떠올라 제 추억 한자락을 풀어봅니다.

별 것 아닌 일들이긴 하지만 제 인생에 이런저런 영향을 준 사건들이지요.

제가 타임머신을 타고 저의 중고등 학생 시절로 돌아가 그 때의 저에게

"넌 나중에 캐나다에서 살게 될꺼야"

라고 말해 준다면 아마 저는 미래에서 온 저를 거짓말쟁이로 생각하고 하나도 믿지 않았을겁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영어는 완전히 손을 놓고 공부를 하지 않았거든요.
아마 저의 영어실력은 공부를 통해서 보다는 중학생 때 빼먹지 않고 매주 시청한 NBA농구 중계와 (저는 챨스 바클리 팬이였어요), 고등학생 때 매일같이 인터넷에 들어가 읽은 NBA기사들과 (갓 ADSL이 시작한 시기인지라 어마어마하게 느린 속도였기에, 이 때 인내심도 키운듯), 요즘은 거의 한국 방송만 보지만 대학생 때 적게는 서너번 많게는 수십번 씩 돌려본 미드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영어에 손을 놓은 계기는 학교 수업인데, 알파벳 대문자는 알지만 소문자는 전혀 모르고 입학한 중학교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정규교육을 통해 배우는 영어임에도 글자는 가르치지않고 갑자기 문법을 이야기하고, 그나마도 '이런 기본적인건 너희 다 알자나' 하면서 넘기는 모습에 먼저 질렸던 탓이 가장 큽니다. 그래도 그 때엔, 갓 중학생이 된 마당이라 의욕이 넘쳤기에 포기하지 않고 따라가보려 했지만 이에 결정타를 날려 더 이상 영어공부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건이 있는데, 바로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 사건입니다.

당시 영어 선생님은 수업시간 끝날 무렵마다, 숙어나 속담 한 문장씩 알려주며, 다음 수업 시작시간마다 단어 쪽지시험과 함께 이전 시간에 배운 숙어나 속담 시험을 봤는데, 어느 날 이 속담을 알려 준 것입니다.

당시에 선생님은 이 속담위 뜻은 부단히 노력하면 나태해지지 않고, 조약돌처럼 항상 반짝반짝 윤이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설명 하셨습니다.
저는 이 속담을 듣고 떠오른 생각이, 계속 정처없이 떠돌면, 아무런 노하우도 얻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생각이 들었기에 그런 뜻이 아니냐고 물었고, 선생님은 단칼에 아니라고 잘라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수업은 끝이 났고, 저는 교탁으로 쪼로로 달려가 선생님에게 찾아가 그렇게 해석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계속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니다' 라고 한마디 하며 교무실로 향했고, 저는 계속해서 선생님을 쫒아가면서 왜 내가 생각 한 뜻이 될 수는 없는 것인지 물었고 결국 저는 교무실까지 끌려가 그 선생님 책상 앞에 서서 꾸중을 들었죠.

"야, 이끼가 좋아? 이끼가 좋은거냐고! 그게 뭐에 좋은데!" 

다음 수업시작 종이 울릴 때서야 저희 반 담임 선생님이 제가 교무실에서 혼나는 것을 보고 저를 빼내서 교실로 보내줬었죠.

이 사건을 계기로 저는 영어공부와 작별을 고했습니다. (어린시절 저는 정말 멘탈도 약하면서 아이러니하게 고집은 또 엄청 셌어요) 당시엔 완전한 작별이라 생각 했는데, 나중에 캐나다에 오기위해 다시 공부를 했으니, 완전한은 아니였네요. ㅎㅎ

이와 비슷한 사건이 고등학생 때도 있었는데, 그 때엔 국어였습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비극으로 끝나는 단편소설 지문의 마지막에 "여전히 하늘은 푸르렀다" 라는 문장으로 끝이 났었죠.
그 때 이 문장에 대해 제가 부정적으로 해석을 했었는지, 선생님이 부정적으로 해석을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명은 "한 개인이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변화를 시키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대세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해석을 했고, 다른 한 명은 "이렇게 실패했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여전히 푸른 하늘처럼 희망이 있다"는 작가가 던지는 마지막 긍정적 메시지로 해석을 했었죠.
선생님과 몇 번 왈가왈부를 하다가 저는 사진작가를 하시는 작은아버지께서 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진을 찍었다 해도 그 의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 당연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서

"예술은 각자가 해석하기 나름 아닌가요?"

라고 말했고, 선생님께서는

"그래, 그 나름에 따라 네 대입도 결정된다." 

라는 말과 함께 결국 지휘봉으로 머리 한 대를 쥐어박히고 끝이 났습니다.

당시만 해도 정말 혁신적인 '체벌 없는 학교' 였기에 정식 체벌도 아니였고, 반 장난식으로 쥐어박힌 거라 맞은것 자체는 크게 기분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원래도 수학과 물리를 좋아해 이과를 어느정도 염두 해 두긴 했는데, 이 사건 이후 각 문장이나 단어의 뜻 하나하나도 모두 암기를 해야하는 인문계가 너무 싫어 이공계로 진로를 확정을 하게 되었죠. 적어도 고등학생 때 까지 배우는 수학이나 물리에서는 간단한 증명으로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정확한 답이 나오기에 내가 틀려도 얼마든 수긍 가능했고, 내가 맞다면 얼마든 증명이 가능했으며, 작은것 하나하나 외울 필요없이 기본적인 몇가지 툴 만으로도 풀이가 가능했으니까요.

한국의 교육이 나쁘다거나, 당시 선생님들이 잘못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는 학창시절 좋은 은사님들과 인연이 많이 있었고(신기하게도 다 수학/물리 쌤들...), 이민 온 이후에도 한국에 갈 때 마다 찾아뵙는 분들도 계세요. 

당시엔 그 선생님들이 이해도 안가고 솔직히 싫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되었건 제가 더 높은 점수를 얻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고, 또 제가 문학적 클리셰나 그 해석을 뒷받침하는 복선들을 놓쳐서 엉뚱한 이야기를 한 것일 수도 있지요.

교사라는 직업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 당시의 사건들에 대해 그 분들은 아무런 기억이 없을 수도 있지만, 저 처럼 학생 개인에게는 적지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선생님도 선생님이지만, 부모라는 역할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아이에게 던지는 작은 말 한 마디와 생각없이 하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아이에게는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는데, 저는 나름 아이를 걱정해 던진 말들이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하나의 큰 선입견을 심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었던 것 같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아이들과 지난 4일간 같이 시간을 보내고, 글을 읽고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저를 반성해 보는 뜻깊은 롱 위켄드네요.

내일부터 다시 일상이 시작인데, 크리스마스 연휴 때 까지 다시 매일매일이 즐겁고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가 되도록 만들어 나가야겠네요.

그런데...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 이 속담의 올바른 해석은 과연 무엇인가요???

2018년 10월 5일 금요일

한국인이라 행복했던 하루

안녕하세요. 약 2달만에 글을 올리게 되었네요.

분명히 7월 말에 연봉협상을 할 때만 해도 제 마음 속에 다음 한 해의 목표는 일을 조금만 하면서 남들만큼 여유롭게 살고, 기존의 성과는 어느정도 유지를 하는 것이였는데, 작심삼일이라고 벤쿠버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온갖 일들이 터지기도 했고 이것저것 제가 달려들 일들이 생겨버려 바쁘게 정말 바쁘게 살았네요.

어제는 팀 동료와 이야기를 하다가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제가 한국인이라서 행복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 하루였습니다.

첫번째 사건은 약 석달 전 기술이민으로 캐나다에 와서 저희 회사로 입사한 인도 친구와 대화 하면서 생겼습니다.  이 친구는 지난주에 하루 휴가를 내고 G1  라이센스 시험을 봤지만 탈락을 했었죠. 오전에 스프린트 스크럼 미팅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저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옥빌에 driving test는 어때? 미시사가보다 좀 더 편하다는 말이 있던데?"

저는 당연히 한국 면허증을 G1으로 교환했으니 캐나다 라이센스 시험과 절차에 대해서는 1도 모르니, 캐나다 면허시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대답 했습니다. 

"어 그래? 혹시 너 우버타고 다니니 너희 집에서 회사까지 대중교통 없자나."

이 친구 입장에서는 모국의 면허증을 캐나다 면허증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상상도 못했으니 제가 면허가 없다고 생각을 해버린 것이죠. 한국 캐나다간 상호 운전면허증 교환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해주니 정말로 부러워했습니다.

그렇게 제 자리로 돌아와 앉았는데, 갑자기 이 친구가 몇 년 전까지는 미국에 살았다는 것이 기억이 났습니다.

"아, 맞다. 너 근데 미국에 살때 면허 따지 않았어?"

"어 미국 면허 있지."

"그러면 미국 면허를 캐나다 면허로 교환하는 방법을 한 번 찾아봐. 아마 있을꺼야."

"근데 반년 전쯤에 만료됐어. 이럴 줄 알았으면 미국 떠나기 전에 갱신 해두고 떠나는거였는데."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려던 찰나, 다음주가 캐나다 Thanks Giving이라는 것이 생각나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면 만료된 면허 갱신 방법 알아봐. 만료 된 면허라도 비교적 쉽게 갱신 될껄?"

"면허 갱신은 미국 내에서만 될꺼야.?"

"어 당연히 그렇겠지. 그러니까 캐나다 휴일에 미국은 평일이니 다음주 월요일에 잠깐 미국 가면 되자나."

"차라리 시험 서너본 보고말지 언제, 어떻게 미국 비자를 받아"

아... 이 친구가 캐나다 영주권은 있지만, 인도 여권이니 미국에 잠시 간다 하더라도 관광 비자를 별도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잠시 깜빡 했던 것입니다.

한국은 미국 갈때 ESTA 신청은 해도 비자 신청은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해줄까 하다가 너무 부러워 할 것 같아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퇴근을 하려는데, 얼마 전 캐나다 시민권 신청서를 낸 우크라이나 친구가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물어보니 11월 초에 컨퍼런스가 있는데, 메일 확인을 지금에서야 해서 갈 수 없다고 안타까워 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오전에 인도 친구와 에피소드가 있었건만 까맣게 잊고 다시 멍청한 소리를 꺼냈습니다.

"왜? 컨퍼런스 참가신청 마감됐어? 아직 남아있을 수도 있어. 마감이라고 떠도 나중에 다시 열리기도 하고"

"아니, 비자가 필요하자나 한달만에 비자받기 거의 불가능이자나"

"아... 넌 비자가 필요하겠구나..."

"너 벌써 시민권 받았어?"

"아니"

"한국도 미국 갈 때  비자 필요 없어?"

"어. 국경 검사에서 캐나다 여권만큼 쉽게 패스하는건 아니지만, 따로 비자 안받아도 되."

"헐... 넌 그럼 시민권 구지 받을 필요 없겠구나"

"어... 나만 생각하면 그렇긴 한데, 지금 캐나다에서 자라고, 교육받고 있는 아이들 생각하면 또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어. 아마 애들 군대 문제때문에라도 시민권 신청하지 않을까 싶긴 한데..."


한국인들에게는 당연한 일들인지라 별다른 혜택이라고 느끼지도 못하고 지내지만, 가끔 다른 나라 출신 친구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한국인이기에 참 많은 혜택을 받고 산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캐나다에 부모님이 처음 오셨을 때에도 당시 아파트 같은 층에 사는 파키스탄인 가족이 (이미 시민권도 받았고, 캐나다에서 아내는 의사 신랑은 저와같은 SW 개발자입니다) 정말 부러워 했었습니다. 자기들도 몇 번 시도를 해봤지만 부모님 비자가 계속 나오지 않는다고요.

잠시 잊고 살았지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낀 하루였습니다.

2018년 8월 19일 일요일

변하지 않은 벤쿠버, 그리고 변한 나

안녕하세요. 지난 10일동안 벤쿠버와 로키산맥으로 잠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2004년 8월. 날짜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캐나다라는 나라에 첫 발을 내딛었던 때 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군요. 2000년대 초반 IT 버블이 한차례 터지며 홍역을 겪은 후이기는 하지만, IT는 향후 수십년간 대한민국을 먹여살릴 먹거리로 여겨지며 IT 산업과 교육에 투자가 활발했던 시기였고, 정보통신부라는 IT산업 전반에 대해 관장하는 별도의 정부 부처가 있었으며 장관역시 관료나 정치 출신 인물이 아닌 삼성전자 반도체 신화 주역 중 한 명인 진대제 장관이였습니다. 저는 시기를 잘 타고난 덕분에 IT 꿈나무 육성정책의 일환으로 진행했던 정통부 교환장학생 프로그램에 편승하여 벤쿠버의 UBC로 교환학생을 나온 것이 바로 2004년 8월 입니다.

벤쿠버에 도착하여 스카이 트레인을 타고, 미리 예약해 둔 AirBnB에 도착해 짐을 풀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벤쿠버 다운타운 데이비 스트리트에 있는 사무라이라는 일식닥 입니다. 이 집이 맛집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벤쿠버에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갈 식당이였죠.



그 당시 학교 학비는 정통부에서 내줬지만, 생활비는 직접 마련해서 가야했습니다. 그리고 정부에서 학생들을 보내놨는데, 생활비 문제로 행여나 공부는 안하고 알바만 뛰고 다닐까봐인지 정부에서 한 달 생활비를 정해놓고, 총 체류기간만큼 곱하여 해당 금액을 먼저 정통부에 송금을 해 두어야 하는 규정이 있었죠. 생활비 문제는 부모님의 도움과 그간 극강의 꿀알바인 과외를 하며 모아둔 돈으로 해결을 했지만, 살면서 체감 해 보니 정부에서 정한 생활비는 기초생계유지비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였습니다.

첫 달에는 생활비를 잘 알지 못해 흥청망청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많이 경험해 보고자 돈을 썼습니다. 먼저 UBC 학생회관에 가보니 세계 최고의 스키장인 휘슬러 스키장의 시즌패스가 UBC 학생에게는 단돈 $99에 판매되기에 스키 광이였던 저는 시즌패스부터 구입 했습니다. 벤쿠버에서 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이지만, 2시간 정도는 문제가 아니였죠. 그리고 그 시즌패스를 이용하기 위해 중고 스키와 스키 부츠를 샀습니다.(돈을 아끼려고 폴은 사지 않았죠 ㅎㅎ) 또한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음식들도 몇 번 사먹었습니다. 예를들어 그리스 식당 (지금도 영업중이며 다른 지점까지 낸 스테포라는 식당입니다)이나 케이준 스타일, 동남아 식당 등에 가서 식사를 해 보기도 했고, 집 주변에 산책로를 따라가면 너무나도 멋진 스탠리 파크가 있다는 것에 반하여 중고 인라인 스케이트도 구매 했습니다. 또 크리스마스 방학 기간에 맞추어 미국 여행을 계획하고 사전에 항공권과 자동차 렌트, 모텔 예약까지 해 두었죠.
하지만 첫 달 살이를 마치고나자 생활비의 압박이 느껴지기 시작 했습니다. 4명이서 2베드룸 아파트를 렌트하고, 식료품비와 전기, 수도, 인터넷 같은 유틸리티비를 내고나며 남는 돈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미 휘슬러 시즌패스를 사 둔지라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스키장에 왕복을 해야 했는데, 이러다가는 돈이 부족하여 버스를 타지도 못하고 시즌패스를 그냥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래서 첫 달에 3-4번 정도 외식을 한 후로는 외식이라고 해봐야 가끔 정말로 밥을 해먹기 귀찮은 날, 같이사는 친구들과 돈을 모아 중국음식 테이크아웃 식당에 가서 반찬 3-4개 세트를 사와 집에서 밥만 하여 먹거나, 버거킹이나 서브웨이에서 반값 이벤트를 요일에 도시락 대용으로 와퍼나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사먹는 정도였습니다. 또, 스키장으로 가는 그레이하운드 버스 비용 마련을 위해 벤쿠버 translink 먼슬리 패스를 구매하지 않고, 주 2-3회 다운타운 랍슨 스퀘어에서 강의가 있을 때에는 도보로 통학을하고, UBC 본 캠퍼스 강의가 있는 날에는 러닝이나 인라인 스케이트로 통학을 하고, 날이 너무 궂은 경우나 시간이 촉박한 경우에만 버스를 타고 다니며 최대한 고정 지출비용을 줄였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당시 저는 인라인을 타는 것이나 러닝을 참 좋아했습니다. 통학을 하지 않는 주말에도 휘슬러에 가는 날이 아니면 거의 매 번 러닝이나 인라인 스케이팅으로 스탠리 파크를 돌았으니까요. 또 식사 역시 제가 요리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주 먹은 대부분의 한식 요리들은 대략의 눈대중으로 흉내를 내서 꽤 먹을만한 정도의 맛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요리의 한계가 찾아오는 분야가 있었으니, 제가 평소에 즐겨먹지 않는 음식인 튀김이나 부침요리 분야였습니다. 평소에 자주 먹어본 경험이 없다보니 요리를 해 보려 해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하는지 부터 전혀 몰랐던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튀김을 좋아하는 친구 중 한 명이 어디서 들었는지 데이비에 있는 사무라이라는 식당에 가면 모듬튀김이 있는데, 양이 푸짐하게 나와 4명이 먹을만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두들 주머니 사정에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외국에 나와 살면서 한 번쯤은 패스트푸드 외에 현지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사무라이라는 곳에 한 번 가보게 됩니다.

지금에서 들게 된 생각인데, 모듬 튀김을 메인 요리로 시켜서 식사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고, 4명이 먹기에 충분하게 푸짐한 양이라는 말은 4명이 각자 자기 dish를 먹으면서 튀김 한 접시를 시켜 같이 share하여 먹기에 충분하다는 말이였을 것 같습니다. 결국 그렇게 방문한 사무라이에서 저희는 온갖 빛깔의 화려한 롤과 스시, 사시미와 우동, 라멘 등 각종 일식 요리들을 테이블 너머로 구경만 하고 튀김 몇 조각 씩 맛만 본 후 집으로 돌아와 다시 밥을 해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10여년이 흘러 캐나다에 이민을 오면서 어느 순간엔가 자연스럽게 생겨난 저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는 사무라이에 가서 먹고싶은 메뉴들을 다 시켜먹고 싶다는 것이였고, 이번 여행에서 그 버킷 리스트를 실현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일단 튀김은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넷이서 왔던 식당에 이제는 가족들과 넷이서 다시 방문하게 되었고, 그때와는 달리 먹고싶은 것은 무엇이든 주문 할 정도의 재력을 가진 지금의 모습에 괜시리 감수성이 폭발할까봐 다른 음식들을 주문했습니다.
아이가 커리카츠와 연어 데리야키 둘다 먹고싶은데 그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했을때, 다른 날 같으면 기회비용 선택도 훈련이 필요하니 직접 선택하라고 할텐데, 그 날 만큼은 둘 다 시키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동, 가라아게, 롤, 스시, 커리카츠, 연어구이, 치라시 등등 어른 둘, 아이 둘 총 네명이서 먹기에 버거울 정도로 많이 먹었습니다.








그렇게 배를 채운 후에는 소화도 시킬겸 데이비 스트리트에서 좀 더 서쪽으로 나와 비치 에비뉴로 향했습니다. 해변가 길을 따라 산책을 하기 위해서요. 제가 살던 집 주변이기에 길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죠.

14년만에 다시 찾은 벤쿠버는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해변가 산책로에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러닝, 워킹을 하는 모습이였습니다. 제 아이들도 14년 전 제가 그랬듯 뻘로 나가 조개껍질도 줍고 파도에 발을 담그며 즐겁게 놀았습니다.

비치 에비뉴를 따라 걷다가 다시 만난 제가 살았던 아파트 역시 제가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 서 있었고요.

그 길을따라 스탠리 파크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다보니 예전에 보았던 돌탑들 역시 아직도 많이 보였습니다. 다만, 그 때 거의 매일 봤던 돌탑을 쌓던 할아버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도 할아버지였는데... 14년이 지났으니... 아마도...



숙소로 돌아오기위해 다시 다운타운 쪽을 향해 가다보니 데이비 스트리트는 여전히 무지개 빛깔로 곳곳이 물들어있었고, 길가에는 다양한 상점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랜빌 아일랜드에 들러보니 여전히 여름철 주말을 즐기기 위해 나온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버스킹을 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나들이객들을 위한 많은 음식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숙소로 다시 돌아가며 그랜빌 스트리트를 지나는데, 예나지금이나 거리 곳곳에 지린내가 진동하며 비바람 피하기 좋은 목에는 홈리스들이 여지없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랍슨 스트리트는 14년 전에도 벤쿠버가 아닌 이태원 같다고 많이들 이야기 했는데, 당시엔 제가 한식당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였는지 몰라도 다시찾은 랍슨 스트리트에는 전보다 더 많은 한식당들이 있었고, 식사 시간에는 심지어 손님들이 몰려와 1-2시간씩 기다려야만 입장이 가능한 곳도 많이 있었습니다.

벤쿠버는 크게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변한 것이라면 제가 재력이 좀 생겼다는 점 같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먹고싶은 음식이 있다면 돈 걱정없이 먹을 수 있으니까요. 또, 그 때엔 저 혼자였지만 지금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있으며, 또 그 뒤로는 아들 둘이 있고, 그 때에 저에게 캐나다란 그냥 외국 중 하나였을 뿐이며 교환학생을 위해 잠시 머무는 나라일 뿐이였지만 지금 저에게는 내가 살고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나라라는 것이 달라졌넨요.

처음 며칠간 벤쿠버에 지내며 14년 전 제가 그랬던 것 처럼 걸어서 다운타운 곳곳을 둘러보았는데, 예전보다 차이나타운 쪽에 고층 건물들이 더 많이 들어선 것 외에는 크게 변한것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변해버린 저로 인해 다른 점들이 여러가지 있었습니다.

예전에 저는 주택가 보다는 벤쿠버 다운타운이 좋았습니다.
곳곳에서 피어나는 담배연기, 대마초 냄새와 언제 어디서나 보이는 수많은 홈리스들, 항상 풍겨오는 지린내들과 취객들과 자동차의 소음이 있지만, 3면 어디를 가도 가까운 해변가 산책로와 너무나도 멋진 스탠리 파크, 그리고 주로 수업이 진행되는 랍슨 스퀘어와 도보로 통학이 가능했고, 스키장으로 가는 그레이하운드 버스 정거장도 가까웠기에 다운타운이 좋았습니다. 

사실 이민을 오면서 벤쿠버로 가지 않은 이유에는 그러한 저의 기억과 경험이 큰 영향을 준 것 같기도 합니다. 버스패스 없이 생활했기에 UBC외에 벤쿠버 다운타운을 벗어난 적이 없어 실제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주택가의 모습이 제 기억에는 없었고, 제가 기억하는 그러한 벤쿠버의 모습은 아이들과 함께 가족이 생활하기에는 부적절한 곳이였습니다.

다시 찾은 벤쿠버 다운타운에서 저는 제 생각이 옳았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택시나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을 벗어나 주변에 다른 동네들을 둘러보니 벤쿠버에 살았어도 장단점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벤쿠버의 스카이트레인이 부러웠습니다. 토론토에서 총 3개의 지하철 노선이 있지만, 토론토 내에서만 연결이되지, 쏜힐이나, 리치몬드 힐, 마컴, 미시사가, 본, 옥빌, 벌링턴 등 주변 도시들과는 전혀 연결이되지 않습니다. 버스 또한 각 도시별로 각기 다른 회사에서 운영되기에 환승연결 등이 되지 않아 비용도 두배가 들어가죠. 반면 벤쿠버는 모두 translink였고, 하나의 day pass로도 모두 방문이 가능했기에 정말 편리했습니다.

또 벤쿠버의 식당 세금이 부러웠습니다. 기본 가격은 토론토보다 아주 조금 비싼 편이였지만, 식당 음식에 주정부 세금이 부과되지 않다보니 총 가격은 토론토보다 조금 저렴하거나 비슷했습니다. 또한, 토론토보다는 보다 관광지의 성격이 짖어서인지 몰라도 음식과 서비스의 퀄리티가 훌륭했죠. 특히나 해산물에 있어서는 내륙에 위치한 토론토와 해안가에 위치한 벤쿠버는 에 퀄리티와 가격 모두 전혀 비교대상이 아니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버나비에 있는 Sushi Garden이라는 한인 스시 가게입니다. 총 3개의 지점이 있는 식당인데, 가면 우선 이름을 말하고 기다려야 하고, 순서가 되어도 한 명이라도 부재중이면 자리 배석을 안해주고 순서가 밀릴 정도로 인기있는 곳이였죠. 연어 스시에 저 꼬리 내려오는 것 보이시나요? 토론토에서는 고급 일식당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이 가게의 음식 가격은 일반 중급 일식당 가격임에도 이러합니다. 사시미 역시 토론토에서는 깍두기 크기로 나온다면, 벤쿠버에서는 석박지 크기로 나왔습니다. 중급 스시 가격에 고급진 맛과 퀄리티에 많은 양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벤쿠버였습니다.




식당 뿐 아니라 상권 전반적으로 아시아의 영향이 큰 벤쿠버의 상권이 부러웠습니다. 농담으로 UBC를 University of Billion Chineses라고 할 정도로 벤쿠버와 그 인근에는 다수의 아시안이 거주합니다. 그렇다보니 식당 뿐 아니라 제과점, 의류, 화장품, 생필품 등 다양한 카테고리에서 아시아인을 타깃으로 한 상점들이 토론토보다 훨씬 많이 보였습니다. 이게 별 것 아닌것 같아도 실제 이민생활을 하다보면 조금씩 조금씩 세세하게 불편한 점 중 하나입니다. 특히나 한국인 사이에서도 덩치가 작은 분이라면 아시아인 인구가 적은 도시에서는 옷이나 신발 하나를 사려고 해도 몸에 맞는 사이즈를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할 정도로 힘이 들기도 한데, 벤쿠버의 상점은 아시아인을 배려하는 제품들이 더 많았으며, 아시아권의 유명 생필품/의류/화장품 브랜드들이 토론토에 비해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한식 식당들도 토론토에 비하면 부러웠습니다.
제가 맛집들만 찾아 돌아다닌 것도 있지만, 확실히 토론토 주변의 한식 맛집들과 비교를 하여도 벤쿠버의 한식당들은 토론토의 그것들에 비해 손님이 더 많았으며 (수십분에서 1시간 대기는 일상이였습니다), 한국인과 중국인을 제외한 다른 민족의 손님 비율이 훨씬 높았고, 테이블 수에 맞는 적절한 서버가 있어 서비스의 퀄리티도 좋았습니다.

토론토와 그 인근의 한식당을 가보면 항상 아쉬운 점들이 몇가지가 있는데, 서비스와 가격대가 그 중 하나입니다. 보통 한식당에는 다른 식당에 비해 서버의 수가 테이블 수에 비해 적습니다. 식사 하나를 하더라도 최소 대여섯 가지의 반찬이 같이 나오는 한식은 서버가 할 일이 다른 음식에 비해 오히려 더 많습니다. 비슷한 가격대의 비슷한 종류의 음식인 스테이크와 갈비를 비교하더라도 스테이크는 접시 하나가 나오면 되지만 Korean BBQ는 고기를 구우면서 중간중간 숯불을 갈아주거나 불판을 갈아야 하는 등 손이 더 많이 갑니다. 하지만 보통의 한식당들을 보면 테이블 수 대비 서버의 수가 부족합니다. 다른 식당들에서는 서버가 어느 한 구석에 서서 자신이 담당하는 테이블들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필요한 것이 있는지 미리 확인하지만, 한식당의 경우 일손이 부족하다보니 손님이 능동적으로 벨을 누르거나 불러서 서버를 찾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벤쿠버의 한식당들은 대부분 다른 식당들 만큼이나 서버의 수가 충분했고, 그래서 토론토에 비해 서비스가 좋았습니다.

음식 자체도 제가 요리를 해보면 한식의 경우 반찬들 때문에 다른 음식에 비해 손이 조금 더 많이 갑니다. 식재료 역시 캐나다 현지에서 구하기 쉬운 것은 아닌지라 재료비 역시 조금 더 비싸고요. 하지만 한식당의 식사 가격은 쌀국수 같이 저렴한 몇몇 음식을 제외하면 다른 음식들에 비해 저렴한 편입니다. 재료비는 더 비싼데 가격은 오히려 더 저렴하다면 결국 직원 임금을 줄이거나, 퀄리티가 낮은 재료를 쓰거나, 점주의 마진을 최소화 시켜야만 한다는 이야기인데, 어느 쪽이건 내가 먹는 음식과 내가 받는 서비스가 나빠지거나, 한인사회 전반에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나빠진다는 이야기인지라 좋은 것은 아니죠.

다만 식당에 있어서 조금 아쉬운 점은 토론토에서는 좀처럼 경험하지 못한 대기시간 이였습니다. 토론토의 한식당은 맛집이라 해도 보통 한국인과 중국인 정도만 이용을 하기에 테이블에 앉을때 까지 대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있다 해도 10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벤쿠버의 한식당에서는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이용을 해서인지 짧게는 30분, 길게는 2시간까지 대기를 해야만 먹을 수 있었네요.

또한 바다와 산을 끼고 있는 지형이 부러웠습니다.
온타리오에 없는 것이 두가지 있다면 바로 바다와 산 입니다. 벤쿠버는 바다와 산을 모두 끼고있기에 다양한 자연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으며, 산악 트래킹과 해양 스포츠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비록 지린내와 대마초 냄새, 담배연기가 넘쳐나긴 하지만 따뜻한 분위기의 상점들이 넘쳐나는 다운타운이 부러웠습니다. 이것은 토론토에 이민와서 처음 느낀 것인데, 토론토의 다운타운은 조금 차갑고 메마른 느낌입니다. 아무래도 토론토는 금융과 산업의 중심지인지라 다운타운에 가더라도 고층 빌딩들만 즐비해 있으며, 그 고층빌딩에는 온갖 회사와 은행들이 자리하고 있지만, 벤쿠버의 다운타운에는 단층이나 저층 건물들이 있으며 그 건물의 1층에는 다양한 식당들과 상점들이 지나가는 행인을 맞이합니다.

이민 목적은 아니였지만, 캐나다에서 첫 발을 내딛었던 땅이였기에 지금은 제가 살지 않는 낯선 땅임에도 왠지 모르게 고향같은 친숙함이 있던 벤쿠버. 이번 방문을 계기로 친숙함에 친근감까지 더해진 것 같네요. 이번 여행 전만 하여도 설령 벤쿠버에서 저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job offer를 준다 하여도 이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지금은 그런 일이 생긴다면 진지하게 고민하고 아내와 상의를 해 볼 만큼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찾은 벤쿠버에서 원없이 이것 저것을 먹고 즐기다보니 저 뿐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허리둘레가 눈에띄게 증가했네요. 다음 주 부터 일상으로 복귀가 시작되면, 다이어트도 같이 병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ㅎㅎㅎ


2018년 4월 18일 수요일

Good bye my friend

어제 하루는 갑자기 회사에 가기 너무너무 힘들고 귀찮아 아침에 급히 휴가를 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IKEA에 가서 이전에 봐 둔 가구들을 사다 하루 종일 조립하고, 주말 사이 우박이 쌓여 만들어진 얼음들 깨고 부수고 치운 덕에 오래간만에 어깨와 허리가 욱신욱신 하네요. 그런데 어깨와 허리 보다 마음이 더 아픈 일이 생겼습니다.

 가구 조립을 마치고 드라이브 웨이의 얼음을 다 치운 후 샤워를 하려는데, 페이스북 메신져에서 띠링~ 하고 새 메시지를 알려옵니다.

 "어라? 이 친구 요즘에 연락해도 답장도 없어서 전화번호도 바뀌고 페북도 끊은 줄 알았는데 왠일이지?"

  연락이 온 친구는 매우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을 가진 저와 비슷한 또래의 (고교시절 이야기를 할 때 연도를 보니 3~4살 정도 많은 것으로 추정) 일본인 친구입니다. 성격이 워낙 조용하다보니 같이 어울려 놀은 기억은 딱히 없지만, 짧게나마 1년간 학교를 다니며 모든 전공 과목을 같이 들었고, 모든 과목의 팀 프로젝트를 같이 했던 친구죠. 평소에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였지만, 제가 토론토에 살 때에는 한두달에 한 번 정도 서로 만나 커피 한잔을 하며 짧게나마 서로의 안부도 묻고 근황 이야기도 했었고, 제가 옥빌로 이사를 간 이후에는 간혹 이메일이나 페북 메신져,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했었습니다. 그러다 반년 정도 전에 이 친구가 위니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 이후 한동안 연락두절 상태였죠. 사기꾼이 아니라 편하다고???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제가 다녔던 학교에는 특정국가 출신 학생이 과반수 이상인데, 그 특정국가 출신 학생들 중 다수가 그런 특징이 좀 있었습니다. 팀 프로젝트에서 각자가 해야 할 기본적인 일에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실력과 능력의 과대포장에는 뛰어나 쓸데없이 많은 일을 하겠노라고 commitment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를 지키지 못하죠. 설상가상으로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기면 뛰어난 공작능력으로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문제로 프로젝트가 산으로 가고 있다고 포장을 잘 하다보니 놀 때에는 따로 가리지 않고 다 같이 놀았어도, 프로젝트 팀을 꾸릴 때에는 저와 비슷한 문화/성향을 지닌 홍콩/대만/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 출신 학생들이나 우리의 형제국가인 터키 출신 학생들과 주로 했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over commitment나 블러핑은 하지 않으니까요. 특히 30대 이상 아저씨들과 주로 팀을 했는데 실력의 정도를 떠나 30대 이상인 경우 최소한의 책임감이 있어 같이 일을 함에있어 서로 불편한 일이 없었거든요.

 사실 이 친구의 성격은 저와 썩 맞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안그래도 저의 영어 실력이 한참이나 부족한데 이 친구 역시 영어를 잘 못해 서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이야기 하다보면 대화의 맥이 끊기고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영어 네이티브이거나 잘하는 친구와 이야기 할 때엔 제가 개떡같이 이야기 해도 상대방이 찰떡같이 알아듣기도 하고, 제가 모르는 어휘나 표현이 나와 이해를 못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보다 쉬운 어휘나 표현으로 rephrase를 해 주거나, 정 안되면 그 단어의 뜻을 설명 해 주어 상대방은 좀 귀찮을지언정 대화가 이어지는데 반해 이 친구와 영어로 이야기를 하다보면 서로의 모국어 억양과 발음이 달라 쉬운 단어도 서로 못알아듣기도 하고, 영어도 못하는 것들이 그 와중에 각자 자신만 아는 어휘나 표현이 있어서 서로 이해를 못하는데, 다른 동의어로 대체하여 rephrase 할 능력은 없다보니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웃으면서 넘어가는 경우도 참 많죠.
그래도 1년간 모든 전공과목들을 같이 듣고 프로젝트를 같이 하면서 같이 잘 지냈습니다. 학교에서 팀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서는 각 과목마다 마음에 맞는 친구가 2-3명 정도는 있어서 같이 팀을 꾸려야 편한데, 이 친구는 실력이 아주 뛰어나 제가 편하게 프로젝트에 얹혀 갈 수 있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성실했고, 자기 실력과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에 대해 블러핑도 안했고, 저와 나이도 얼추 비슷했던지라 계속 붙어 다녔죠.

 첫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FSWP로 영주권 신청을 할 때에 저는 이 친구에게도 졸업을 기다리지 말고 FSWP 지원을 해 볼것을 권유 했었습니다. 이 친구도 어학 점수만 6.5 이상 나오면 FSWP로 지원이 가능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친구는 1년이 조금 넘는 오랜 기간에 걸쳐 패스웨이를 한 후에 시험 없이 학교에 입학을 한 친구입니다. 1년넘게 패스웨이가 걸린만큼 원래 영어를 잘 하지 못하기도 했고, 한 번도 영어 시험을 본 적이 없던터라 IELTS 시험을 보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래서 시험보기 무섭다며 제가 FSWP 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아갈 때 차일피일 미루고 또 미뤘습니다. 그러다 그 해 가을 제 FSWP 이민 프로세스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본 이 친구는 드디어 IELTS 시험 준비를 하면서 시험 예약을 하기 시작했는데, 아직 FSWP 67점은 안되었지만 거의 그에 근접할 수준의 성적표를 받은 시점에, 그 해 SW Engineer NOC의 FSWP 티오가 마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다음 해를 위해 그 친구는 계속 시험을 치뤘지만 2015년이 되어 Express Entry에 대한 모든 것이 알려진 이후에는 사실상 FSWP 이민을 포기하고 영어 시험 준비도 중단을 했었습니다.

 결국 저는 입학 후 1년이 안되어 영주권을 받았고, 바로 회사에 나가 일을 하기 시작했지만, 이 친구는 원래 계획대로 PGWP를 위해 계속 학교를 다녀야만 했습니다. 이 친구가 하던 프로그램은 코업이 있는 프로그램이였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컬리지 학생들이 코업 일을 구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코업을 구하지 못해 중간에 강제 방학을 맞이하기도 했고, 결국에는 졸업 전까지 코업을 못하여 프로그램도 논 코업 프로그램으로 변경하여 졸업을 했죠. 그렇게 졸업을 하고 이제 진짜 일을 구할 시기가 되었는데, 이 친구의 캐나다 취업운은 졸업을 해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제가 보기엔 이 친구보다 실력도 부족하고 영어를 더 잘하지도 않는 다른 친구들도 결국엔 어떻게든 취업을 했지만, 이 친구는 면접 과정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저희 회사에 오픈된 포지션과 매칭이 되기에 이 친구를 추천하려 했는데 HR에 연락을 하니, 방금 전에 인터뷰 본 지원자를 채용하기로 해서 해당 포지션은 지금 close 될 것이라고 해서 인터뷰도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2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힘겹게 전공 관련 일자리를 구했는데, 그 친구의 PGWP의 남은 기간은 1년이 채 안된 시점이였습니다. 이 친구가 원래 생각했던 CEC를 위해서는 (또한 다른 대부분의 이민을 위해서는) 1년 이상의 경력이 필요한데, 남은 워크퍼밋 기간을 풀로 다 채워도 1년 경력이 안나오는 상황이 된 것이죠. 그 때부터 이 친구는 저에게 종종 연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이런 상황에서 가능한 이민 프로그램을 아는지, 그런 케이스를 본 적이 있는지 많이 물어봤었습니다. 정확한 기간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1-2달 정도 짧은 기간이였던 것 같은데, 이 친구는 회사를 다니면서 회사의 주정부 이민 지원 등 여러가지 가능성들에 대해 이러저리 알아 보았지만, 1년 미만으로 남은 현재의 워크퍼밋으로는 토론토에서 영주권을 받을 길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어느날 갑자기 위니펙으로 날아갔죠. 위니펙에서는 6개월만 일을 하면 주정부로 이민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말이죠.

 처음 위니펙에 간 이후에는 간혹 직장은 구했는지, 이민은 계획대로 잘 진행 중인지 안부차 연락을 하면 "여긴 벌써 겨울이 시작되나봐", "토론토는 참 따뜻한 도시였어" 등 조금 다른 이야기들의 답변이 오더군요.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메신져로 연락을 해도 답장이 없고,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다. 아마 전화는 이미 위니펙으로 넘어가면서 지역번호가 바뀌면서 번호가 변경되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고, 메신져는 페북을 끊었나 생각했죠. 그렇게 썩 친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저도 힘들었던 학생시절에 함께 했던, 그리고 한동안 연락이 두절되어 궁금했던 그 친구에게 오래간만에 연락이 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온 메시지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메시지였습니다.

 "나 7월 말에 일본행 '편도' 항공권을 예약 했어"

저의 손가락들은 한동안 핸드폰 화면 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냥 일본행 항공권을 샀다고 하면

 "휴가가니? 잘 다녀와"

 "너 고향이 어디라고 했지?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와"

등의 인사라도 할텐데, '편도' 라는 이 한 마디가 지금 이 친구의 상황에 부정적인 모든 것을 내포하고 심하게 어두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구지 애둘러서 '편도' 티켓을 샀다고 애둘러 말 한 상황에서 스스로 아픔을 꺼내기 전에 제가 들추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애둘러서 이상한 소리들만 한동안 한 것 같아요.

 "Is it still cold in Winnipeg? Entire my village became arena due to frozen rain during last weekend."

 "We should meet once again sometime. Let's drink Sake and Biru at that time."

 "Try to visit gorgeous places before you leave. Have you been Banff?"

 "I think you must see Aurora at once."

 ...

 얼추 계산을 해보니 이 친구가 15년 여름 학기를 마치고 졸업을 했으니, 올해 8월 즈음이면 PGWP가 만료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년 9월인가 10월 즈음에 위니펙으로 이사를 갔던 것이고, 현재는 당장 오늘 취업을 한다 해도 워크퍼밋 만료 전 까지 매니토바에서 6개월의 경력을 만들 수 없으니 포기를 한 것 같네요. 

어쩌다보니 오래간만에 연락을 하는데 서로 정작 하고싶은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서로 변죽만 울리는 상황에서 그냥 진심으로 하고싶은 말 한마디를 했습니다.

 "If you have a chance to come to Oakville or near to Oakville, please contact me. I would like to serve a dinner once, indeed!" 

하지만 제 말에 이 친구가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가 더 마음아픈 말이였습니다.

 "Thank you, but I don't think I will come to Canada again."

저의 빈약간 기억력에 정확히 캐나다였는지 미국이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이 친구는 20대 때에도 이민을 위해 북미에 몇년간 머물렀던 적이 있었고 실패하여 일본으로 돌아간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30대 후반에 (혹은 40대 초반) 재 도전을 했지만 40대가 된 지금 이렇게 다시 한 번 영주권을 받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되었으니, 다시는 안올 것 같다는 그의 말은 정말일 것 같네요.

 이 친구는 워낙 말이 느리고, 말주변도 별로 없지만 (처음엔 단순히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학교 영어과목 강사 중 한 분이 일본에서 오랜기간 강사 생활을 하여 일본어를 아주 잘 했는데, 그 분 말에 의하면 이 친구는 일본말도 대화의 템포가 상당히 느린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성실하고 착한 친구였는데... 무언가 질문을 던지면 10-20초 후에나 full sentence를 만들어서 대답하는 그 친구의 화법이 행여 취업 길을 막은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저는 영어를 참 못하지만 그래도 제가 아는 내용이면 비문이더라도 휘릭휘릭 대답은 합니다. 단, 한국말과 비슷하게 주어가 생략된 말은 매우매우 자주 하는 편이고, 시제와 단/복수도 거의 생각 안하고 마구잡이로 말하는 편이며, 심지어 수동/능동 또한 제 멋대로 바꿔 그냥 제 입에 잘 붙는 말을 해버리는 편입니다. '난 내 할 말을 내가 알아서 다 한 것으로 나의 임무를 마쳤으니 너는 니가 알아서 내 말을 이해하는 것으로 너의 임무를 다 하거라.'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이 친구는 대화의 템포는 참 숨 넘어가게 느리지만, 이 친구가 하는 말들을 곱씹어보면 마치 성문 종합영어 예문에서 봤던 것 같은 완성형 문장을 만들어서 하거든요.

 5년 밖에 안된 저의 이민 생활이지만 간혹가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인들이 각자의 모국으로 돌아갈 때면, 그다지 친하게 지낸 사람이 아니더라도 왠지 모를 허전함이 밀려오곤 하는데, 참 헤어짐이라는 것은 적응하기 쉽지 않은 이벤트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몰랐는데 이민 생활을 하면서 생긴 허전함이라고나 할까요? 그가 다시 캐나다로 올 일은 아마도 없을 것 같고, 저도 딱히 일본에 갈 것 같지도 않으니 앞으로 서로 볼 기회는 없을 것 같지만, 부디 일본에서 세번째로 다시 시작하는 그의 삶에는 어려움이 없이 잘 풀리기를 진심으로 빌어봅니다.

2017년 11월 11일 토요일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의 중요성

근묵자흑, 유유상종 등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자성어들이 많고, 그 중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인 배우자를 잘 만나는 것일텐데, 이민에 있어서도 좋은 사람들을 얼마나 만나게 되느냐가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민을 하기 전에 많이 보게 된 이야기는 "한국 사람을 가장 조심하라" 였습니다. 먼저 이민 간 사람이 새로온 이민자를 등쳐먹는다거나, 새로 온 이민자들이 그들을 도와주려던 이민 선배들을 벗겨먹는 이야기 등등 참 많이도 봤습니다.

그런데 처음 캐나다에 랜딩을 한 순간부터 제가 만났던 한국분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였습니다. 

캐나다에 랜딩을 한 순간 이민관 이후 가장 먼저 만난 분은 제 임시 숙소였던 민박집 주인 내외분인데,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민박집에 머무는 동안 현지 사정에 어두운 저같은 새내기들을 위해 본인들이 알고있는 다양한 정보들과 노하우들을 알려주시기도 했고, 엔지니어로 일하시는 아저씨를 통해 이쪽의 직업시장이나, 구직 팁 등을 안내받기도 했고 저와 비슷한 분야에 종사하고 비슷한 또래의 다른 사람들을 소개시켜주셔서 또 다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하셨죠.
또, 가족들과 함께 살 만한 아파트를 구해 민박집을 떠날 때에도 새로 구한 아파트까지 차로 왕복 해 주시며 제 짐을 다 옮겨주셨고, 쌀은 무거워 대중교통으로 오가며 구매하기 힘들다며 한인마트까지 태워주셔서 쌀 구입도 도와주시고, 또 당분간 홀애비 생활이 걱정되셨는지 큰 통에 반찬도 직접 만드셔서 따로 챙겨주셨었고요.

그 이후에도 좋은 분들과의 만남은 지속됩니다. 가족들이 캐나다로 오고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며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학교생활 적응이 가장 큰 문제가 되던 시절, 같은 학교에 아이들이 다니는 많은 학부형들을 통해 이런저런 조언과 도움들을 받았습니다. 저희는 차없는 생활을 계속 했었는데 우리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다른 학부형 집에서 장을 보러 갈 때, 제 아내가 항상 같이 다니며 차가 없이도 한국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또 나중에보니 저희 아파트 바로 맞은편 집은 한인 노부부가 사시는 집이였는데, 그 분들을 통해서도 이런저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히나 저희 부모님이 캐나다에 잠시 머무시는 동안 그 분들이 좋은 벗이 되어주시기도 했고, 저희같은 젊은세대는 알 수 없었던 제 아버지께서 궁굼해 하시던 여러가지 정보들을 잘 알려주시기도 했고요.

뿐만아니라 짧았지만 학교를 다니던 기간 중 만난 같은과의 많은 동생들과 형님들과는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좋은 벗이 되어 멀리서라도 서로 응원해주고 격려하며 잘 살고 있고, 토론토를 벗어나 이사를 온 이후에도 아이들을 통해 이런저런 경로로 알게된 다른 한국인 이민자 가정들과 여러가지 도움을 서로 주고받으며 잘 지내고 있지요.

만약 저와 제 아내의 인복이 좋지 못하여 여러 글에서 보았던 악덕 민박집 사장님들을 만났고, 이번에 경찰에 잡힌 김OO씨 같은 사람을 통해 가족과 살 콘도를 계약하게되어 사기를 당하고, 서로 힐난하고 질투하고 헐뜯는 한인 이웃들을 만났었다면, 또 바로 이웃집에도 친절한 한인 노부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글에서 보았던 노랜내가 진동하는 이민자 노부부를 만났다면, 친절하고 서로 배려할 줄 아는 이웃들이 아니라 서로 힐난하고 비난하고 헐뜻는 이웃들을 만났다면 지금과 같은 삶의 만족을 느끼지 못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솔직히 저는 아직도 이민 카페들에 수두룩하게 널린 악랄한 한국인 이민자들의 스토리들이 정말 이 정도일까 싶기도 합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지난 4년간 그런 분들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요. 각자의 성격이나 성향에 따라 혹은 각자의 삶의 무게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매너 혹은 말투등이 다양했고, 간혹 서로 맞지않는 성향인 경우 조금 불편하게 느끼거나 살짝 미간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건 그냥 서로간 궁합이 잘 안맞는 정도이지 여러 스토리에서 보여지는 범죄자에 가까운 그런 행위들은 아니였으니까요.

그리고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또 다른 이민자들을 만날 때 더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각 인종에 대한, 혹은 출신 국가에 따른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 심지어는 능력에 대한 다양한 선입견들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저는 이민 전에 인도 개발자들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제 머릿 속에 그들에 대한 이미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잘못된 선입견의 예...
개발실에서 일을 하다보면, 인도 연구소에서 간혹가다 특정 프로젝트로 인해 서너달 가량 파견을 나오거나 장기 출장을 나오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받았던 제일 큰 인상은 상당히 스마트하고 쉬지도 않고 일을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출장자인지라 인도 연구소의 근무일에 맞춰야 해서인지 몰라도 한국 휴일이 되어도 출근해서 일을 했고, 제가 토요일에 나와도 일요일에 나와도 그들은 항상 자리에 있었습니다. 또 쉬지도 않고 일을 하기도 했지만, 상당히 그 퀄리티가 높았습니다.

이것은 제가 캐나다에 오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인도인 개발자들에 대한 선입견이였는데, 지금은 이것이 상당히 왜곡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삼성에서 만났던 출장자들은 상황상 상당히 스마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습니다. 인도 내에서 삼성 연구소는 상당히 괜찮은 직장이며 그 곳에 들어오기 위해 경쟁이 치열한 곳 중에 하나입니다. 뭐 좋은 직장으로 사람이 몰리는 이유가 회사 자체가 좋아서도 있지만, 이 곳의 경력을 발판으로 실리콘벨리 등으로 진출하기에 좋기에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양질의 개발자들이 모여있는 곳이고, 그러한 양질의 개발자들이 모인 조직 내에서도 나름 일을 잘하는 개발자들이 추려져 본사 프로젝트로 파견을 나오는 것이니 일을 잘하고 또 열심히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상황이였죠. 또 저는 본사 소속이고 그들은 인도 연구소에서 파견나온 상황인데다, 그들에게는 그들 뿐 아니라 그들의 팀의 일년 농사가 저희팀과 함께하고 있는 프로젝트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다보니 험블할 수 밖에 없기도 했고요.

캐나다에 온 이후 이러한 잘못된 선입견들은 하나씩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1%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외국에 나온 인도 사람이면 다들 상류층이나 엘리트라는 생각은 정말 잘못된 생각이였습니다. 짧게나마 학교를 다니며 많은 인도인 친구들을 봤는데, 솔직히 말해서 평균적으로 그들의 생활은 일반적인 한국인 유학생들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또 그들 중 저와 가장 가깝게 지낸 그룹에 있는 친구들의 경우에는 인도에서도 학자금 융자를 통해 대학을 졸업했고, 지금 여기에 올 때에도 온 친지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비자를 받아 온 것이고, 캐나다에서 생활비와 학비도 주 20시간 알바만으로는 당연히 충당할 수 없는 상황이다보니 밤샘 캐쉬쟙 알바를 뛰면서 졸업만을 바라보며 달리는 친구들도 몇몇 있었습니다. 그래도 학교 졸업에는 크게 문제가 없던 것 중 하나가, 인도인 친구들은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의 과목별 족보를 가지고 있더군요. 일부 과목들의 경우 시험 시작 30분 만에 인도인 친구들은 모두 시험을 마치고 나가기도 했었습니다.

또 인도 사람은 수학적으로 매우 뛰어나고 인도인 개발자는 매우 능력이 좋다는 것도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 많이 깨졌습니다.
실제 인구 비중에 비해 개발자 중 인도인의 비중이 더 높다고 느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공계가 상대적으로 강한 국가들인 한국, 중국, 이란, 구 소련연방 국가들 (러시아, 우크라이나, 발틱3국 등) 출신 이민자들도 똑같습니다. 개발자 중 한국인 비율도 일반적인 인구비중 대비 높고, 구 소련 국가들 출신 개발자 비중도 일반적인 인구비중 대비 높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인도인 개발자들을 보게 되었는데, 여러 부류의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다보니 기존의 제 선입견이 말 그대로 선입견임을 깨닿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정말 똑똑한 사람도 간간히 있기도 하지만, 이 사람이 평생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을정도로 어리바리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숫자나 논리에 대한 센스는 확실이 서구유럽 출신 이민자나 북미에서 나고 자라고 교육받은 사람들에 비해 강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저와 같은 일반적인 한국사람들이나, 구 소련연방이나 중국인들에 비해서 특별하게 우수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workaholic이라는 선입견 역시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서 역시 무너졌습니다. 그냥 제가 한국 직장에서 보았던 것 처럼 일을 정말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고, 적당히 하는 사람도 있고,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절대적 책임감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분야는 나몰라라 하는 사람도 있고... 정말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처음 만난 인도인 개발자나 인도 유학생들이 제 선입견들과 정확히 맞았다면, "응 걔네들은 원래 그래." 라는 생각이 오히려 더 강해져 그 이후 다른 모습의 사람들을 보게 되더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일텐데,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고 그들도 사람이기에 각 개인마다 다른 특성이 있는 집단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닿게 된 것이죠.

그러고보면 유치원 때 부터 한강의 기적 등을 이야기하면서 주구장창 들어온 이야기가 "한국인은 근면 성실하고...." 라는 말인데, 이 말도 역시 잘못된 것 같습니다. 한국인의 DNA에 근면과 성실이 무조건 박혀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마치 선민의식같이 한국인은 타고난 근면 성실맨이라는 이야기도 잘못된 이야기 인 것 같아요. 한국인 중에 정말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도 있겠지만, 조금은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제 생각에는 한국인 스스로를 표현하는 이런 말이 족쇄가 되어서 사회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근면 성실해야 한다는 강요아닌 강요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인종차별이 상대적으로 심한 한국에서 수십년간 자라고 교육받고 생활을 해 온지라 여러 인종과 민족, 국민들에 대해 많은 선입견들이 제 머릿 속에는 아직도 남아있고 알게모르게 영향을 주기도 하겠지만, 지금은 가능한 누군가를 처음 만나게 되면 그러한 배경은 최대한 걸러내고 대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2017년 11월 1일 수요일

캐나다에서의 삶의 여유란?

지난 한 달여간 저희 집에 장모님이 머물다가 가셨습니다.

당초에는 2달 조금 넘게 계실 예정이였는데, 이 곳에서 생활이 언어나 교통편 등의 문제로 제약이 있다보니 아무래도 조금 무료하셨던 것 같더라고요. 다른 이민자 가족분들과 이야기를 해 보아도 처음에는 아들딸도 보고, 손주들도 보고 싶어서 오실 때 항공권이 비싸다보니 몇 달 일정으로 잡고 오시지만, 막상 오고나면 자녀들이 휴가를 내 봐야 며칠 혹은 1-2주 뿐이니 남는 시간에 무어라도 하셔야 하지만 캐나다에는 지인도 없고 언어도 불편하니 몇 주가 지나면 항공권을 다시 변경해서 예정보다 일찍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이 있더군요.

다소 생뚱맞은 이야기 일 수도 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시면서 하신 말씀 중 한 마디가 생활과 삶의 여유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었습니다. 원래도 필력이 아주 부질없지만, 오늘의 글은 그냥 머릿 속에서 터져나온 생각을 정리없이 쓰는 글이라 정말 난잡한 낙서같이 될 것 같군요.

아내의 사촌언니는 이민은 아니지만 주재원과 주재원 연장으로 지금 10년 넘게 중국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중국의 물가는 상대적으로 싸다보니 아이들 교육도 필요하면 모두 과외를 시키고 대부분의 집안일은 사람을 가사도우미를 써서 합니다. 아무래도 인건비가 비싼 캐나다에서 사는 저희는 가사도우미를 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고, 제 아이들도 과외나 학원을 다니기도 하지만 예체능 쪽만 그러하고, 아이들의 한국어, 영어, 수학 등 공부와 관련된 것은 제 아내가 주로 붙잡고 시킵니다. 얼마 전에 중국 처형네 놀려갔다 오셨던 터라 캐나다에 오셔서 저희가 사는 모습을 보시니 아무래도 제 아내의 생활 측면에서 비교가 되면서 조금 속상하셨던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제 아내에게 캐나다 생활에 만족은 하고 있는지, 또 이민을 온 결정에 대한 후회는 없는지 이야기를 해 보았고 다행스럽게도 만족하고 후회 없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저 역시도 캐나다에 온 것에 후회나 미련은 없는지 돌아보았습니다.

제가 캐나다에 온 이유와 궁극적 목적은 단 하나, 제 직업이였습니다. 다시 Developer가 되고 싶었고, 또 평생 그 일을 즐기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일단 "평생 즐기면서" 부분은 앞으로 수십년간 더 살면서 지켜봐야 하겠지만 "다시 Developer가 되기"는 성공을 했으니 현재까지 진척률은 좋은 것 같고 이에 상당히 만족합니다.

그런데, 이 목표를 위해 캐나다까지 오게 된 것은 당시 저의 어정쩡한 나이에 개발 경력이 단절된 상황에서 개발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인데, 정확히 말하면 전혀 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죠. 정말 많은 것들을 내려 놓았다면 무급이나 열정페이 인턴이나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스타트업에서 지분을 일부 받는 조건으로 일을 시작 할 수도 있었고, 육아휴직 기간 중 창업을 준비하던 친구의 사업에 지분을 투자하고 들어가 개발을 다시 할 수도 있었죠.

하지만 한국에서 다시 한 번 Developer가 되기위해 노력하지 않은 이유는 당연히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기 싫어서였습니다. 한국에서 Developer가 된다면 페이가 얼마건 저희 부부에겐 가장 암흑기였던 시간으로 돌아가 저녁/주말/휴일 없이 일을 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았고, 당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 내에서는 지금만큼의 연봉이 전혀 보장되지 못했고, 일정규모가 되거나 자체 수익 솔루션이 없는 IT 회사로 간다면 직위가 올라갈 수록 개발보다는 결국 관리나 영업으로 빠져야 할텐데, 그렇다면 평생 개발자의 목표에 반하게 되니까요.

즉 다시 한 번 당시의 생각으로 돌아간다면, "개발자가 되고싶고, 이 일을 평생 하고싶은데, 즐기면서 하기 위해 충분한 보수를 받으면서도 충분한 개인시간을 보장받고 싶다."가 저의 생각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제 목표에서 직업 관련은 이미 이루었다고 치고 삶의 영유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 과연 어떤 것이 삶의 여유인지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돈? 저녁이 있는 삶? Work-Life Balance? 노후에 대한 안정감? 시간?

노후에 대한 안정은 한국 보다는 나아요. 한국도 국민연금이 잘 되어있긴 하지만, 캐나다의 연금제도가 한국 보다 살짝 조금 더 안정적인 소득을 제공하기는 합니다. 토론토 도심같이 집세가 비싼 곳에서 거주 할 만큼의 돈은 안나오지만, 시골의 한적한 동네에서 자신의 집 재산세를 내거나, 렌트비를 내면서 살기에는 살만한 수준의 돈이 나옵니다.

충분한 연봉? 이건 사실 아닌것 같습니다. 평균적인 개발자 임금 수준은 한국의 그것에 비해 확실히 높기는 합니다만, 한국 대기업 기준으로 보자면 썩 높지는 않습니다.
캐나다의 경우 한국보다 물가도 더 비싸고, 최저임금도 2배 이상 높고 세율도 한국보다 많이 높으니 저도 처음에는 캐나다에서 시니어 개발자가 되면 20만불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회사 후배 중 실리콘벨리에서 일을 하고있는 후배에게 듣기로, 실리콘 벨리의 인턴 개발자 연봉이 요즘 10만불 언저리라고 했고, 저는 그 정도의 임금수준이 북미 전역에서 비슷할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캐나다에서 인턴이나 엔트리 레벨 개발자의 경우 4.5-5.5만불 정도의 임금을 받고, 시니어가 되어도 10만불도 못받는 시니어들이 적지않게 있었습니다. 세율과 물가를 무시하고 환율 차이만 계산하여 고려해도 엔트리 개발자의 임금은 사원 수준이며, 시니어의 연봉도 대리에서 과장 수준이였습니다. 과장 이상에 평가 고과가 좋은 경우라면 세전 절대금액도 캐나다 시니어 개발자 임금 이상을 수 있는데다 한국은 캐나다에 비해 소득세율도 낮고 물가도 낮으니, 소득에 대한 기회비용을 계산해보면 한국에서 더 높은 소득을 올렸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캐나다에 가면 한국보다 더 나은 소득과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오시는 분들도 가끔 있는데, 사실 소득 면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처임금에 대해서는 한국보다 2배 이상 높지만, 최저소득과 그 언저리를 벗어난 일자리들의 임금수준을 보면 한국의 중소기업 보다는 나아도 평균 임금수준이 높고 상여금이 많이 나오는 한국의 대기업들과 비교 시 썩 높지 않거나 오히려 낮은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한국에서는 다소 찬밥 신세인 전기/배관공 등 기술을 요하는 trade 일자리들의 경우 한국보다 더 높은 임금을 받습니다. 보통 지식노동자 일자리들은 시간당 임금보다는 연봉인데, 이를 시간당 임금으로 전환 해 계산해보면, 지식과 기술이 거의 비슷한 대우를 받는 사회라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렇다보니 지금 당장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충분한 연봉이나 이전보다 더 나은 가계수입은 아닙니다. 그래도 한 가지 장점이라면 장점은, 이 나라에서는 제가 시장성이 있는 수준으로 계속 제 지식과 기술을 높여 나간다면 언제까지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제 능력과 실력이 뒷받침이 된다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계속 진급을 하여 임원도 되고 부사장도 되고 사장도 되면서 언제까지건 일을 할 수 있긴 하지만, 이 곳에서는 저의 몸값에 걸맞는 수준의 실력을 유지만 하면 됩니다. 즉 계속 치고 올라가야만 생존이 가능 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머물러도 생존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직 수십년이 남아있긴 하지만, 제가 진정으로 은퇴를 할 시기가 되었을 때 지금까지의 누적 소득을 생각하면 결코 손해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녁이 있는 삶과 Work-life balance는 어떨까요?
간혹 캐나다 등 복지가 발달된 국가들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들이 있는데 그 나라 국민들은 게으르다는 인식 입니다. 하지만 이미 제가 선입견이라고 말 한 것 처럼 잘못된 생각이라고 느낍니다. 요즘 교육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가 한국에서 교육 받을 때에는 '한국인은 근면 성실하고....' 라는 말을 자주 교육받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한국인들이 근면성실할까요? 한국인의 DNA에는 근면과 성실이 기본으로 자리잡은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사회적으로 근면 성실을 미덕으로 여기며, 사회는 각 개인에게 모두 근면 성실할 것을 강요하고, 또 근면 성실의 영역이 주어진 시간을 외에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의 책무 영역에 투자 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근면 성실하게 살아지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노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을 싫어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국인의 삶 기준으로 보기에 캐나다 사람은 게으르고 나태하고 책임감이 낮다고 보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제가 많은 부류의 캐나다 사람들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제가 보기에 그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회사가 아무리 바빠도 사전에 계획한 개인 휴가가 있다면 뒤도 안돌아보고 휴가를 갑니다. 회사에서도 그렇게 떠나는 휴가에 대해 제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업무 시간에는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업무시간을 벗어난 시간이라면 비록 몸은 사무실에 자리하고 있지도 않고 업무시간 외 근무에 대해 주어진 책임은 없지만, 관련 업무에 일이 생기면 즉각 반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 지난 주 주말 밤에 저희 팀에서 관리하는 서비스들의 모니터링 시스템에서 이상동작이 보고되었습니다. 메일을 본 저는 회사 PC로 원격 접속해서 로그 분석을 하고 하나씩 수정 및 테스트를 하고 있는데, 30여분이 지나자 매니져 포함 6명의 팀원 중 4명이 접속을 해서 매신져를 통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1시간 정도 흘러 root cause 분석이 완료 된 시점 즈음에는 개발팀 VP도 접속해서 같이 확인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나머지 2 명은 계속 오프라인 이였지만, 그들이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질책을 받거나 문제가 될 일은 없습니다. 그냥 각자 스스로 가진 책임감의 범위에 따라 행동을 하는 것이지요.

한국의 직장인들은 자기계발에 압력을 받습니다. 영어도 공부해야 하고, 요즘은 중국어도 필요하다고 하니 중국어 공부도 하고, 업무 성과를 인정받으려면 PT도 잘해야 하니 PT 교육도 받고, 경우에 따라서는 회사 정책에 따라 직원 일인당 특허 하나씩 보유해야 해서 특허 연구도 하고... 회사에서 정책적으로 이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는 곳도 있지만, 회사가 아니더라도 방송 등 언론을 통해서도 직장인들의 자기계발에 대해 무언의 압력을 계속 행사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는 계속 치고올라가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기에, 그냥 그 자리에 머무르고 싶어도 머물 수 없으니 반 강제적으로 자기계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캐나다에서는 이에대해 상대적으로 자유롭습니다. 스스로 더 높은 자리로 발전을 원하는 사람들은 정말 많은 것들을 찾아 공부하고 익힙니다. 그냥 그 자리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그냥 현재를 즐기기도 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알고 지내는 캐네디언이 누구냐에 따라 보이는 시각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데, 제가 회사에서 보는 대다수의 동료들은 상당히 부지런하며, 자기계발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제 매니져만 해도 1달간 휴가를 내고 캐러비안에 놀러간 기간 동안 당시로서는 저희 팀에서 새로 도입하는 툴인 chef와 kitchen, 그리고 AWS 서비스 세가지에 대해 정말 많은 공부를 하고 왔더군요. 사실 이제는 더 이상 개발자가 아닌 매니져인지라 그렇게 깊은 수준으로 기술 공부를 할 필요도 없는데 말이죠. ㅠㅠ

지금도 저는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일을 하고는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7시까지 일을 하면서 거의 12시간 일을 하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퇴근은 3-4시에 하지만 퇴근 후 일을 하기도 합니다. 오랜기간 현업을 떠난 상황이라 그 시간공백을 메꾸고 싶다는 욕심도 있거니와 제 나름의 목표하는 지향점에 도달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3-4시에 퇴근을 한 다 해도 사실 그 때부터 완벽한 자유시간은 아닙니다. 그 때 부터 또 다른 환경에서 업무와 공부가 시작되지요.
그래도 차이가 있다면 모든 시간이 물리적으로 강제된 환경이 아니고, 시간에 대해 제 자율로 조절을 할 수 있기에 제 스스로만 조절을 잘 한다면 100% 만족 할 만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아직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수준으로 work-life balance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민 후의 생활이 정말 꿀같고 달콤하고 풍요롭다고 생각하고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직장을 구하고 생활비 대비 소득으로 보면 매우 풍족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본인인의 위치에 따라서는 캐나다에서 소득이 덜 풍족할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직원에게 요구하는 수준이나 근무시간 등은 정말 꿀같고 달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차에 따른 대우를 받는 사회는 아니기에 더 인정받고 더 올라가고 싶다면 그 달콤함을 완전히 즐길 수는 없고, 어느 정도는 스스로에게 채찍 질을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 위치와 자리와 대우에 만족하고 그대로 머무르고 싶다면 도태되지 않는 수준으로만 노력하면 되기에 여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도 여유를 즐기고 싶다면 역시나 private sector가 아닌 public sector에 들어가서 일을 해야 되겠죠. :)

2017년 10월 9일 월요일

이민자의 Thanksgiving Day

안녕하세요.

한국은 오늘까지 특별휴일 - 추석 - 개천절 - 한글날로 이어지는 10일간의 연휴로 알고있는데, 캐나다도 오늘까지 추수감사절 연휴 기간이였습니다.

캐나다에서는 이런 연휴 기간을 보통 long weekend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정말 특정한 날이 중요한 경우, 예를들어서 캐나다의 개천절 쯤 되는 7월 1일 Canada Day나 12월 25일 Christmas, 1월 1일 New Year Day 같은 날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휴일이 "xx월 n번째 월요일"와 같이 지정이 되어있어 항상 연휴가 되기에, 일반적인 주말보다 더 길어서 long weekend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얼마나 긴 것인가를 보자면, 그냥 주말보다 조금 깁니다. 한국의 설이나 추석과 같이 3일씩 되는 휴일이 없이 모두 단 하루만 휴일이기에 토일월 3일 휴일이 되는 것이지요.

Christmas가 주말을 끼고 있다면,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26일도 Boxing Day 휴일이기에 운이 정말 좋다면 4일간의 연휴가 이론상 가능하기도 하고, 바로 올해가 그렇게 4일 연휴가 만들어지는 해 입니다.

한국의 추석이 올 한 해동안 농작물의 수확에 감사드리고 조상과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는 명절인데, 사실 추수감사절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Long weekend기간동안 Family re-union이 이뤄집니다. 부모님의 집 등 가족의 집에서 모이기도 하고, 가족들이 함께 모이기 편한 제 3의 휴양지나 다른 곳에서 모이기도 합니다. 다른 휴일들의 경우 각자 자신의 가족 (부모 + 자녀)이 함께 이곳 저곳 놀러가거나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크리스마스와 추수감사절 만큼은 이들도 자신의 가족이 아닌 좀 더 넓은 의미의 가족을 찾아갑니다.

한국 추석의 대표 음식이 송편이라면 여기는 모두들 아시듯 커다란 칠면조를 오븐에 구운 요리를 먹습니다. 10여년 전 벤쿠버에서 유학중일때, 저도 친구들과 함께 명절 기분을 내보고자 마트에서 가장 작은 크기의 칠면조를 사서 오븐에 구워본 적이 있는데, 다시는 하지 말자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죠. 칠면조는 몸통이 워낙 커서 굽는데 시간이 매우 오래걸리기도 하고, 그냥 놔두면 되는 것이 아니라 겉 표면이 타지 않도록 칠면조를 구우면서 발생하는 기름을 계속 칠면조에 부워가며 구워주어야 해서 음식 준비를 하는데 시간이 상당히 오래걸리며, 또 손이 많이갑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인 그다지 맛있지 않은데 그 양이 어마어마 합니다. 결국 칠면조 한 번 구운 덕에 이후 거의 1달동안 4명의 유학생들의 점심 도시락은 칠면조 샌드위치였다는 슬픈 전설이...

그 음식이 무엇이 되었건,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것 자체만으로 뜻 깊은 시간일텐데, 가족들이 함께 모이기 힘든 이민자들은 Thanksgiving에 무엇을 할까요?

저의 기억력은 좋지 않지만 IT 기술들은 저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구글포토도, 페이스북도 몇 년전 오늘의 사진들을 보여주며 제 기억을 되살려 주네요.

캐나다로 건너온 후 첫 추수감사절에 저는 제 가족과 함께 여행을 했었네요.


첫 추수감사절 여행을 간 호텔

호숫가에 위치한 작은 호텔에서 머물며 캐나다에서 맞이하는 첫 가을을 즐기러 갔었죠. 위 사진만으로는 참 조용하고 행복하고 여유로운 여행이 되었을 것 같지만, 당시의 일기를 보니 참으로 복잡미묘한 감정에 흔들리며 어려웠던 그 때의 감정이 조금이나마 다시 생각이 납니다.

낯선 언어와 환경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본인도 어렵고 힘들지만 더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케어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친 아내를 위해서라도, 또 원래 여행을 좋아하는 저 자신을 위해서라도 우리 모두를 위해 힐링을 하자는 생각으로 여행을 준비 했었습니다. 아직 차가 없던 시기라 차량 렌트도 해놓고, 비싸지 않지만 그래도 여행을 갔다는 기분은 적어도 낼 만한 지역과 숙소를 찾아 예약하면서도, 지난 10개월간 단 돈 1센트도 벌어본 적이 없는 가장이 무책임하게 이런 소비를 해도 되는 것인가 고민을 했던 흔적도 보이고, 여행 중에도 스스로의 마음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아이들이 작은 실수 한 것이 도화선에 불을 당겨 쓸데없이 아이들을 혼내놓고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하기도 했고...

사진첩에는 아름다운 사진들이 가득차있긴 하지만, 셀카봉으로 찍은 가족 사진 중 한 장에는 아빠의 감정조절 실패로 쓸데없이 잔뜩 혼나 주눅이 들은 아이들과 함께 억지 웃음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합니다.

그 다음 해 추수감사절을 사진을 통해 돌아보니 별다른 여행은 하지않았고, 새로 이사 온 동네 탐방에 나섰었네요. 동네 주변 farm에서 열리는 Thanksgiving 페스티벌과, 동네 올드타운에서 열린 이벤트에 참석을 했었네요.
Oakville 추수감사절 행사

뭐 이벤트라고 해봐야 대단한건 아니고 올드타운 시내를 한바퀴 도는 마차를 시에서 무료로 제공해주는 것 정도입니다.

그래도 전년과 달리 사진 속 저와 아내의 표정에 근심이 보이지 않고, 소소한 페스티벌과 행사이지만 그 자리를 즐기고 있군요. 아이들도 이제는 학교생활과 언어에 대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때라, 휴일 이후 학교가기 싫다는 말을 했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고, 잔뜩 혼난 후 억지웃음 지으며 찍은 사진도 없네요. 첫 추수감사절 long weekend와는 달리 신분과 일자리와 또 살 곳의 문제가 해결된 상황이라 여러모로 근심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기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연휴 마지막 날 월요일, 밤에 아이들 동영상을 만들고 편집하면서 "양가 부모님들이 이런 명절 때라도 아이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라는 생각을 남겼군요.

이후 Thanks giving은 계속 비슷한 것 같습니다. Long weekend 성수기인지라 구지 비싼 숙소를 예약하기 보다는, 인근 Provincial Park나 Conservation Area를 찾아가 트래킹도 하고, 월말의 할로윈을 대비해 pumpkin carving을 하는 이벤트가 있으면 찾아가는 정도로요.

현지 사람들처럼 Thanksgiving이 되었다고 비행기나 기차나 차를 타고 먼 길에 나서지 않아도 되니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그렇게 가족을 향해 떠나가는 그들이 부럽기도 한 것이 이민자의 Thanksgiving day가 아닐까 합니다.

올 해 Thanks giving은 그래도 좀 특별합니다. 한국에서 장모님이 와 계시기 때문이지요.
이민을 오면서 다른 가족들에게, 특히 장모님, 장인어른께는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선 한국을 떠날 때에는 정말 약속 된 것도 없고, 뚜렷한 미래도 없는 상태에서 외손주들과 딸을 데리고 떠나는 사위였고, 이후로 저희 가족끼리는 나름 만족하는 삶을 살 정도로 정착을 했지만, 이 곳에서 어떻게 살고있는지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드리지 못했고, 또 먼 곳에서 피붙이를 보지 못하는 그리움을 갖고 살게 했기 때문이지요.

이맘때가 되면 가족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것은 비단 한국인과 캐네디언 뿐만은 아닙니다.

연어 또한 이 시기가 되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향해 달려가는데요, 지금이 바로 연어의 회귀 시즌입니다. 그래서 이번 Thanksgiving을 연휴 기간동안 장모님을 모시고 지금 한창인 연어 회귀를 보러 나갔습니다.


어쩌다보니 한 곳도 아니고 세 곳을 보고왔네요.

토론토 인근에 가장 유명한 Salmon Run watching spot은 Port Hope와 Bowmanville 입니다. 하지만 두 곳 모두 집에서 1시간 반 가량 떨어져있어 가까운 미시사가의 Erindale 공원으로 갔었습니다.

어떤 블로거께서 Port Hope나 Bowmanville은 약간 인공적인 냄새가 가는 관광지의 성격이라면 Erindale Park는 대자연 속의 연어를 볼 수 있다고 한 말 때문이기도 했죠.

사바나의 대자연 속에서 벌어지는 리얼 사파리 여행을 가면 에버랜드 사파리와는 달리 사자라고는 하루에 한 마리 보면 잘 보는 것입니다. Salmon run 역시도 대자연 속에서 보다보니 한시간에 한마리를 볼까말까 하더군요. 약 45분 가량을 크레딧 강 줄기따라 걸어서 오르내렸는데, 그 동안 본 연어라고는 낚시꾼이 잡은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연어가 만약 많다 하여도, 연어가 Jump를 할 만한 낙차구간이 없었습니다.
묵묵히 강물을 역류하여 오르는 연어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오랜 기간동안 고향을 찾아가느라 먹지도 못하고 지친 연어들이 폭포와 같은 낙차구간을 만나게 되었을때 실패해도 계속해서 시도하는 것을 지켜보는 인간들에게는 종족 보존의 본능과 도전정신 등을 일깨워주는 멋진 장면이기에 이를 포기할 수 없었죠.

결국 공원에서 아침 도시락으로 싸온 김밥과 떡볶이를 먹으며, 폭풍 검색을 하여 지난번에 이미 방문한 바 있는 Port Hope말고 새로운 장소인 Bowmanville로 갔습니다.


Bowmanville creek에 들어섰을 때 산책로의 모습과, 작지만 이쁜 계곡물은 합격점을 받았습니다.

또 이른 새벽부터 낚시를 즐기고, 어른 몸통 길이만한 연어를 각자 한 마리씩 들고 나오는 낚시꾼들이 제 아이들에게 서로 질세라 자신이 낚은 연어를 자랑질하는 모습을 보며 기대감에 가득 차 댐이 있는 장소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댐이 있는 곳에 도착해보니 일단 댐의 규모가 Port Hope보다 작다보니, 댐 밑에 물이 고여있는 웅덩이도 작았고 그래서 연어들을 매우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또 Erindale의 Credit river에 비해 더 많은 수의 연어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Port Hope에 비하자면 그 수가 압도적으로 적었고, 연어들의 수가 적다보니 점프를 하는 모습을 쉽사리 볼 수 없었습니다.

Bowmanville에서는 비교적 연어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30분 가량을 Bowmanville에서 보내다가 이미 Durham Region까지 나온 마당에 조금 더 가서 Port Hope까지 못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Port Hope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Port Hope에 도착하여 Fish Ladder가 있는 곳으로 가니 수 많은 연어, 아니 사람 떼를 만났습니다.

오늘만 생긴 특수한 일인지, 아니면 몇 년 사이에 더 유명해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Fish Ladder 앞 주차장은 물론, 인근 길가에도 차로 가득 찼더군요. 그래서 먼저 가족들을 내려준 후 몇 번 주변을 빙빙돌다 차를 주차했습니다.

역시 Port Hope는 그 규모면에서 다른 곳들이 따라오지 못 할 것 같습니다.

동영상의 첫 장면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댐에서 200-300m 떨어진 하류에 물길이 약간 잔잔한 곳에는 보시는 바와 같이 말 그대로 물 반 고기 반의 장면이 연출됩니다. 댐 바로 아래 웅덩이에는 물 약간 대부분 고기인 장면이 연출되고요.
물 반 고기 반

이렇게 연어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보니 적어도 1 분에 한마리 꼴로는 댐을 거슬러오르기 위해 시도하는 연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어류학자도 아니지만 오늘 하룻동안 세 개의 강을 방문하여 연어가 회귀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Port Hope에서 댐보다 조금 위 상류부터 강물을 따라 하류까지 아이와 같이 걸어가다가 도중에 지쳐 죽어있는 연어의 모습을 바라보며 제 아이가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아빠, 나 아빠랑 같이 낚시 꼭 해보고 싶은데, 연어 낚시는 안할래요."

"왜? 너 연어 스시 좋아해서 연어 낚시를 해볼까 했는데?"

"강에서 점프하다 돌에 머리 부딛쳐 죽고, 점프 잘못해서 숨 못숴서 죽고, 지쳐서 죽고... 댐에선 올라가려고 계속계속 점프해서 겨우겨오 올라가서 이제 막 알 낳으려는 연어인데, 어떻게 그걸 잡아요?"

한국을 떠나기 전 자주 봤던 뽀로로 덕분에 항상 낚시에 대한 로망이 있던 아이인데, 계속해서 부딛치고 실패해도 도전하는 연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다 하더군요.

확실히 몇 해 전 처음 이 곳을 왔을때 보다는 생각이 더 여물은 것 같습니다. 그 때엔 분명,

"아빠도 낚시 할 줄 알아서 나랑 같이 연어 낚시하면 좋겠어요"

라고 했었거든요. 모르는 사이 아이들은 점점 커나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