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7일 화요일

사람 오래 만나고 볼 일입니다 - 이직 3주차 후기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달 쯤 전, 현 직장의 인터뷰 프로세스 중 on-site 인터뷰를 할 때로 돌아갑니다.

두 번의 인터뷰를 거친 후 on-site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on-site 인터뷰 관련 상세 스케쥴이 전달되었는데, 다른 회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유있었습니다. 각 1시간씩 총 3번의 인터뷰가 back to back으로 계획되어 있었죠.

사건은 그 중 첫 번째 세션인 architect와 인터뷰에서 발생했습니다.

간단하게 서로 인사를 한 후 제 경력에 대해 이것저것 짧은 질문과 답을 주고받은 뒤 본격적으로 인터뷰가 시작되려는데, 인터뷰어에게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옵니다.

"평소의 내 인터뷰 스타일 대로 진행할께. 난 너에게 아무 문제도 던지지 않을꺼야. 네가 풀고싶은 문제를 풀어봐"

뭐라고? 이게 말인지 당나귀인지... 온라인 스도쿠라도 들어가서 스도쿠를 풀까? 숨은그림 찾기를 할까? 3+3=? 이런 산수 문제를 풀까? 도무지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발언으로 일단 저를 흔들었습니다.

10-20초 정도 "흠..." 하는 소리와 함께 시간을 끌자 인터뷰어는 짜증이 잔뜩 섞인 말투로 말을 합니다.

"내가 뭐 어려운 문제를 낸 것도 아니고, 그냥 네가 하고싶은 거 하라는데 뭐 그리 시간을 끌어? 이러다 한 시간 다 지나간다. 그냥 네가 좋아하는 문제 풀어."

이건 또 말인지 방구인지... 문제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있다고. 그래서 이렇게 말 했죠.

"글쎄, 솔직히 네가 어떤 것을 보고싶은지 판단이 안되서 어떤 문제를 스스로 풀어야 할지 방향을 아직 못잡았다."

"그런거 모르겠으면, 그냥 다른 회사에서 인터뷰 봤을 때 풀었던 문제를 지금 풀어봐."

이 회사의 인터뷰를 보기 전에 많은 인터뷰들을 봐 왔다면 모르겠지만, 이 회사는 이번 이직을 결심한 이후 두 번째로 진행되는 인터뷰였기에 단 한차례의 on-site인터뷰만 본 상황이였습니다. 더구나 제가 조사한 바와 on-site 이전에 기술 인터뷰에서의 질문내용을 보면 이 회사에서는 leetcode 스타일의 알고리즘 문제를 주로 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제가 이전에 인터뷰를 본 회사는 알고리즘보다는 간단한 구현을 해 나가며 인터뷰어와 커뮤니케이션을 해 나가는 과정을 보는 회사였기에 적합한 문제가 아니였죠. 설사 그 문제를 가져온다 하여도 문제를 풀 때에 받았던 데이터가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요.

그렇게 다시 10-20초 정도 고민을 하니 인터뷰어의 짜증이 터졌습니다.

"아니 너, 아무것도 기억 안나니? 그냥 바로 직전에 본 인터뷰 문제 가져와 봐. 뭘 고민해 내가 복잡한 거 물어본 것도 아니고 그냥 단순한 요구사항인데 그걸 대답 못해?"

결국, 다른 곳에서 봤던 on-site문제를 가져올 수는 없었기에 제 3의 다른 회사에서 본 첫 번째 technical interview 문제를 가져와서 다른 회사 인터뷰에서 풀은 문제가 이것이라고 말을 했죠.

제가 문제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 인터뷰어가 한 마디 합니다.

"난 그 문제의 포인트를 모르겠다? 뭐가 문제상황이고 뭘 풀겠다는거야? 그런것도 인터뷰 문제가 되나?"

그래서 제가 leet code style의 알고리즘/자료구조 문제를 원하는 것인지, OOP 설계에 대한 문제를 원하는는 것인지, 아니면 코딩 스킬을 보는 문제를 보고싶은 것인지 재차 물었죠.

"아니, 그런것 말고 지식과 경험과 생각을 볼 수 있는 그런 문제 말이야."

뭐지? 인류의 공동번영과 공존을 위한 모두가 행복해지는 그런 제품을 가져오라는 것 같아 다시 10-20초정도 뜸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저를 뽑을 마음이 1도 없지만 그냥 인터뷰 프로세스가 시작되었으니 중도에 취소하기 미안해서 억지로 인터뷰를 보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죠.

결국 잠시 짜증의 끝을 보이던 인터뷰어는 인터뷰를 보면서 내가 이런 것 까지 해야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자기가 문제를 내겠다고 합니다.

흠... 뭐지? 인터뷰를 하면서 인터뷰어가 내가 질문까지 해야하나 의구심을 품는다고? 그럼 나는 인터뷰이로서 내가 질문에 답까지 해야하나 의구심을 품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즉석에서 질문을 만들어가던 그가 낸 문제는 결국 graph를 통한 길찾기 문제였고, 문제를 풀어나가며 어떤 알고리즘을 쓸 때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등등을 질문했습니다.

인터뷰 초반부터 네가 하고싶은 일을 하라는 아주아주 훌륭한 인간의 자율성을 북돋던 인터뷰어의 발언과 이후 몰아친 폭풍 짜증에 잠시 멘탈이 털렸던지라 인터뷰가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가 없었죠.

질문을 하는 분위기 상 DFS와 BFS관련 내 지식을 테스트 하고 싶은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왔지만, 이 용어가 도무지 생각이 안나서, 끝장을 볼 때 까지 한 놈만 패는 방법과 일단 같은 레벨로 넓게 나가는 방법이라는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여지없이 인터뷰어는 지금 자신의 1분 1초가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짜증섞인 말투로 추가 질문을 이어갔죠. 결국 나중에 Depth first와 Breadth first라는 말을 하자 작은 미소를 띄며 말 하더군요.

 "Now you are there. There you go"

이런 식으로 잔쯕 쫄아버린 저는 인터뷰 내내 평소같으면 알 만한 내용임에도 제대로 대답을 못하거나, 용어가 기억이 안나서 일반적인 자연어에 가까운 말로 답변을 지속하며 결국 1시간을 다 채웠습니다.

이렇게 엉망이 된 첫 세션을 마친 후 다행히 멘탈을 찾았고, 나머지 두 세션을 마쳤지만, 인터뷰 후의 느낌은 추후에 맞이하게 될 다른 인터뷰들을 위한 좋은 초석 정도였죠.

2 주 정도의 시간이 흘러 당연히 탈락일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도 안하고 다른 곳의 인터뷰들을 하나씩 보고 있는데, 이 회사의 리크루터로부터 15-20분 정도 통화를 하고 싶다며 연락이 왔습니다. 탈락 소식과 함께 인터뷰 피드백을 주는 줄 알았는데, 통화를 해 보니 왠걸? 제가 붙었다고 하네요???

다만, 이 말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Tech interview, Hiring Manager interview, Director Interview, On-site interview 다 잘 한 것 같은데, 인터뷰어들 중 딱 한 명이 네 채용에 강하게 반대해서 의사결정이 좀 오래걸렸다 미안해"

이 말을 듣는 순간 누가 반대했을지는 바로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어, 맞아. 어떤 인터뷰인지 나도 알 수 있을것 같아. 나 한 번 심하게 절었어. 그래서 솔직히 너한테 연락 올 꺼라고 기대도 안했어."

"응. 다른 인터뷰어들 평가는 다 좋았는데, 그 한 친구가 채용에 반대를 해서 팀 내부적으로 의견 조율을 좀 오래 했나봐. 그래도 디렉터가 드라이브 해서 일단 최종 결론은 합격이야. 축하해."

그렇게 시작된 협상은 몇 번의 조율을 거친 후에 3 주 전부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협상 과정을 거치면서도 그렇고, 일을 시작할 때 까지 계속 마음에 걸리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on-site에서 첫 세션에 저를 인터뷰 한 인터뷰어였죠. 인터뷰 전 리크루터가 보내온 인터뷰 패키지 상의 정보에 의하면 Architect라는 것 까지는 알겠지만, 저와 같은 팀인지 아닌지도 몰랐고, 저와 얼마나 자주 부딛치며 일을 하게 될 것인지도 의문이였습니다.

입사를 하고 회사 HR 시스템에 접속을 할 수 있게되자마자 바로 찾아본 것이 그 architect의 이름인데, 이런... 저와 같은 팀 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디렉터와 제 프로젝트의 매니져에게 지정받은 제 work peer인 컨택 포인트는 다른 Sr. Staff Engineer였죠.

하지만 제가 매니져와 디렉터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일까요? 프로젝트 전까지 총 3시간 정도의 Knowledge Transfer 미팅만 같이하고, 막상 프로젝트 킥오프를 하는데 저희 팀에서는 오직 저 혼자만 할당이 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며칠간 좌충우동 중구난방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찾아 긁어모아서 하나씩 해 나가다보니 몇몇 infrastructure에 변경이 필요하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위한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이전에 지정받은 제 peer에게 물어보니.... 자기는 그 쪽 전혀 모르고 그 architect가 요즘 그 쪽에 한창 작업을 리드 중이니 그와 함께 일을 하라는 답변을 받게 됩니다.

결국 제 채용을 끝까지 반대했다던, 그 architect와의 업무적 동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workaholic이라고 느낀 것이 이 친구는 동부 시간 기준으로 오전 10시 정도부터 slack message와 이메일 등을 날리기 시작해서, 동부시간 밤 10시가 되어도 slack으로 quick sync하게 통화 가능하냐는 메시지를 날립니다. 이 친구가 사는 서부 시간 기준으로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 까지 최소한 12시간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제가 금요일 밤 늦은 시간에 PR을 보내면 죄다 토요일이면 리뷰를 합니다.

기왕 가까이 붙어서 같이 일을 하게 되었으니 기존의 선입견은 최대한 버리고 다시 중립적으로 다가서려고 하는데, 오늘은 제가 PR리뷰 요청을 한 일도 없는데, 밤 9시 30분에 빨리 콜을 하자고 메시지가 옵니다. 지금 운동중이라 빨라야 30분은 걸린다고 해도, 아무리 늦어도 상관 없으니 오늘 내로만 연락을 달라고 합니다.

짐에서 운동을 하다말고 부랴부랴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와 콜에 들어가보니 인도 팀 직원이 이미 한 명 와 있습니다.

결국, 본인이 현재 리드중인 프로젝트의 개발환경 관련하여 인도팀에서 신규 채용한 직원이 문제를 겪고있었고, 본인의 개발환경은 intel CPU MacBook이지만 인도 친구는 M1 MacBook이기에, 최근에 M1 MacBook에서 개발환경을 셋업한 저에게 콜을 요청 한 것입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요청의 flow라고도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 방향성이 아닌 속도... 당장의 콜이 아닌 이메일이나 슬랙을 통해 시간차를 두고 async하게 진행 될 수도 있지만, 이 친구는 인터뷰 도중 10-20초 정도 마가 뜨는 것을 참지 못했던 것 처럼 인도에서 생긴 문제를 참지 못하고 본인 시간대 기준으로도 저녁이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뛰어들은 것이죠.

그렇게 3자 통화를 하면서 다시 느꼈는데, 정말 이 친구 어디서 많이 본 스타일의 사람입니다.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질문에 상대방이 답을 할 때 조금이라도 마가뜨면 바로 짜증을 냅니다. 저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모두에게 그런 스타일의 사람이였죠.

다행이라면 다행일까요? 길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8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봐 온 저의 상관들은 대부분 그런 스타일이였습니다. 그래서 그 날 이후로 오래간만에 그들에게 사용했던 대화법을 이 architect에게도 사용 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중요한 것은 무슨 질문이든 즉각적인 리액션이 필수입니다. 정말 어느 방향으로 답을 해야할지 잘 떠오르지 않을 경우에는 최소한 질문을 rephrase하면서 약간의 추가 질문을 하는 식으로라도 시간을 벌어야지 질문에 즉답이 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바로 짜증이 날라옵니다.

그리고 질문이 아닌 의견 제시와 함께 동의를 구할 때에는 일단 긍정을 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제가 science보다 engineering을 더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정답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상황에 따라 정 반대의 답이 정답일 수도 있고, 부연 이유에 따라 또 다른 것이 정답이 될 수도 있죠. 짜증이 많건 나를 싫어하건 지금까지 봐온 바에 의하면 짜증으로 포지션을 차지한 것이 아닌 실력으로 포지션을 차지한 사람은 맞습니다. 그러니 정말 똥멍청이 같은 소리는 적어도 하지 않기에 그의 의견에 긍정을 한다고 하여 완전히 틀릴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긍정을 해 준 후에 조금의 수정을 해 줍니다. 

"이야 좋은 생각이다. 너도 이미 생각 했겠지만 거기에 이런 반대급부까지 고려해서 이렇게 만들면 정말 최곤데?"

아니면 2개 정도의 완전히 다른 방향성을 가진 후보군 중 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골랐을 경우에는

"그래, 둘 중에 우리에게 좀 너 나은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니 A가 적합한것 같아. 비록 B에 이런저런 장점이 더 크고 A에 이런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종합적으로 보면 A가 더 맞겠지?"

이렇게 하면 결국 똥멍청이가 아닌 그는 A에 문제점에 대해서도 인식을 하고 최소한 이에대한 보완을 충분히 하거나, B로 방향을 선회하게 됩니다. 결국 최종 의사선택 과정에서 제 의견이 직접적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기에 구지 따지자면 제 공이 남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경험상 이런 유형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가기엔 이만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성격이 급해서 즉각적인 피드백이 없으면 짜증을 내거나 심지어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하지 않으며, 자존감이 높아 본인에 반대하면 일단 이에대한 방어를 하는데 머리까지 좋아 방어를 너무 잘 합니다. 하지만 본인의 자존감을 높여주며 대화를 하면 상대에 의견을 좀 더 들어주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잘 하죠.

아니나 다를까, 그 날 3자 통화를 하기 전 까지 사사건건 저와 충돌이 있던 architect는 제가 대화법을 바꾼 이후부터 저와 많이 가까워졌습니다. 말 하는 방법을 바꾸고 이틀 정도가 지났을 때에는 이 친구가 저와 대화를 하면서 처음으로 웃는 표정까지 짓더군요. 항상 미간에 주름이 가득한 모습만 봐 왔는데 말이죠.

그리고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팀 채널에 제가 올린 PR을 공유하면서 PR은 이렇게 작성해야 한다고 메시지를 날립니다.

며칠 전 부터는 제가 POC 프로젝트 때문에 자주 건들였던 쪽의 구조와 관련하여 변경이 필요 할 때 마다 저에게 의견을 물어봅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POC 프로젝트 관련하여 팀원들에게 Knowledge Exchange를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 아키텍트가 이를 녹화하여 엔지니어링 팀 전체에게 필독을 권장한다며 메시지를 보냅니다.

전 정말 대인관계를 귀찮아하고 대인관계의 시작인 사람 이름과 얼굴도 거의 기억 못하고 네트워크 쌓기 및 관리에 빵점인 사람이지만, 한국에서 군생활을 할 때 모셨던 대대장과 직장생활을 할 때 모신 상관들이 신기하게도 급한 성격에 짜증이 많은 스타일인지라 그나마 이런 사람들과 대충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네요.

요즘 느끼는 문제가 있다면 이 친구가 저에게 너무 자주 말을 거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상호간 아무 이슈가 없는데, 본인이 하고있는 여러 프로젝트들 중 하나에서 새로운 방향성을 정하고 생각하면 꼭 저에게 말을 걸어 제 생각을 물어보네요.

아무래도 이 친구와 이야기를 할 때엔 그냥 제 생각대로 말을하면 안되고 살짝 전략적으로 말을 해야 이 친구의 짜증회로를 피해가기에 저도 대화를 하면서 다른 스트레스를 받으니 약간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싶은데... 뭐 그래도 저의 채용에 끝까지 반대했던 사람인데, 이젠 나름 저를 믿는 사람 중 한 명이 된 것 같아 다행이긴 하네요. 실제로 작게나마 제가 이 회사에서 바꾸고 싶은 것 중 하나에 대해 제 의견에 강한 지지를 표명하며 추진되게 드라이브를 해 준 친구가 이 친구입니다.

이 친구와 이렇게 까지 가까이 일하게 될 지 전혀 몰랐는데, 하여간 사람은 오래 만나고 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