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19일 수요일

심심한 캐나다, 즐거운 캐나다

캐나다에 와서 영주권도 받고 일도 하면서 지내던 사람들 중에도 한국으로 리턴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캐나다에서의 삶이 좀 지루하고 심심해서 그렇다는 분들도 계시죠. 캐나다 워홀, 유학, 해외 취업, 이민과 관련된 글들을 봐도 캐나다는 한국보다 정적이다보니 상대적으로 삶이 지루하고 심심하고 따분하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신이 나고 자란 땅이 아닌지라, 성년이 되어 이 곳에서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에는 어느정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한국만큼 다양한 유흥문화? 가 없다보니 특히나 한창 유흥문화를 만끽할 20대라면 유흥 시설이나 문화가 한국보다 적고, 같이 지낼 친구가 적기에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캐나다에서의 생활이 지루하거나 심심하지는 않네요. 적어도 아직 까지는요. 오히려 겨울을 제외한 계절의 주말과 퇴근 후 저녁 시간에는 한국에 있을 때 보다도 더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캐나다의 장점! 이라고 말하면 먼저 나오는 것이 자연환경이죠.
네, 놀이시설, 클럽, 테마파크, 키즈카페 등등 인공적인 유흥시설은 분명 한국보다 뒤쳐집니다. 그나마 캐나다에서 이런 것들이 가장 발달된 벤쿠버나 토론토도 서울의 그것과 비교하자면 비교 대상조차 되기 힘들죠.

제가 종종 제가 사는 동네를 '시골'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사실 인구 20만의 토론토 인근 도시입니다. 한국의 수도권 도시 주택가에서 야생동물을 보기란 참 쉽지 않죠. 요즘에는 참새조차 그 모습을 점점 잃고 있고요. 하지만 캐나다에서는 아래 사진처럼 집 뒷마당에 찾아오는 아기토끼 손님도 볼 수 있고, 이런 토끼같은 작은 동물을 잡아먹으려는 매도 볼 수 있습니다.
주택가에서 조금만 벗어나서 공원쪽으로 가면 종종 사슴도 보이고, 토론토 인근에서 조금 벗어난 소도시의 farm house 같은 곳에서는 저녁이 되면 늑대도 볼 수 있죠.



이렇게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다보니, 주택가에도 자연이 잘 보존된 공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동네로 이사를 온 지 1년이 조금 넘었음에도 아직 집 반경 10Km내에 모든 트레일 코스를 다 가보지 못했네요.








겨울철을 제외하면, 아니 겨울이라도 눈이 쌓여있지 않고 바람 안불고 해가 떠있는 날이면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인근 트레일 코스들을 하나씩 달리곤 합니다. 그렇게 달리다가 야생동물이나 물가를 만나면 잠시 멈춰서서 구경을 하거나 물놀이도 하고요.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기 전에는 스쿠터(한국에선 킥보드? 씽씽카? 라고 하던가요?)로 산택을 했고요.

주택가 골목 곳곳 마다 작은 연못이나 계곡 주변에는 짧은 트레일 코스들이 있고, 짧은 트레일 코스들이 왕복 2차선 주택가 차길 하나만 건너면, 서로 연결되서 수십 Km에 이르는 긴 트레일 코스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차를 타고 5~10분만 가면 큰 규모의 공원들이 있습니다.
무료 개방되어 있는 공원들도 있고 차량별 혹은 인원별 입장료를 받는 conservation 공원들도 있고요. 이런 공원들은 아무래도 그 규모가 더 크다보니 더 깊은 자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연인도 아니고 너무 자연만 찾는 것 아니냐고 하실 수 있는데, 찾아보면 작은 커뮤니티들에서 진행하는 festival이나 event들이 참 많고 다양합니다. 이런 행사들이 집중적으로 열리는 부활절에서 추수감사절 사이의 기간에는 차로 30분 이내에 갈 수 있는 지역의 행사들만 찾아봐도 거의 모든 주 주말 달력이 가득 찰 것입니다.

Festival은 한국의 지역 특산물 축제처럼 보통 무언가 주제가 있습니다.
벌꿀 페스티발, 푸드트럭 페스티발, 메이플 시럽 페스티발, 할로윈 페스티발, 옥수수 페스티발, 화재 방지 페스티발, 교통안전 페스티발, 중국음식 페스티발, Greek 페스티발, 이탈리안 페스티발, 한가위 대축제 (한인회 주최) 등등...

행사의 요소요소 역시 한국의 그것과 비슷하죠. 주제가 되는 특산품이 있다면 그 제품을 판매하는 매대가 있고, 그 주변에는 지역 상권에서 텐트나 트럭에 매대를 차리고 다양한 제품을 판매합니다. 그리고 푸드트럭들이 주변에 자리잡아 먹거리를 제공하고, 행사장 어느 한 곳에는 야외무대가 설치되어 있어서 초청가수의 무대가 꾸려지거나, 연극/뮤지컬/인형극/마술쑈 등을 하기도 하고, 지역 주민 노래자랑 같은 행사도 합니다. 호숫가에서 열리는 행사라면 요트, 카약, 모터보트와 같은 수상 스포츠 대회를 같이 열기도 하고, 규모가 큰 행사라면 에어쇼를 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특산물 축제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입장료와 놀이기구입니다.
보통 이런 행사에는 입장료가 있습니다. 그리고 미드나 헐리웃 영화에서 동네에 카니발이나 축제에 간 남주, 여주가 같이 놀이기구를 타면서 즐기는 모습을 간간히 볼 수 있는데요, 이런 festival에 같이 오는 것이 놀이기구 입니다. 에버랜드급을 기대하셨다면 실망하실테고, 아무래도 이동식 놀이기구를 설치하기에 월미도급 정도를 생각하셔야 할 것 같네요.



위 사진은 캐나다에서 가장 큰 이벤트라고 하는 CNE (Canadian National Exhibition) 사진입니다. 보통의 festival이나 event들은 금~일요일 3일간 열리는 반면 CNE는 양쪽 주말을 끼고 2주간 진행됩니다. 2주 넘게 진행되는 행사다 보니, 위 사진처럼 상당히 괜찮은 놀이기구들이 많이 딸려옵니다. 작은 festival이라면 성/미끄럼틀/배 모양의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어 만드는 놀이기구인 bouncy castle 정도만 있거나 가끔 전혀 없기도 하죠.

festival에서 타는 놀이기구의 가격은 상당히 비싸긴 합니다만(1번 탑승에 $4~8), 제 아이들은 이 맛에 festival에 가곤 합니다.


위 사진은 잘 보일지 모르겠지만, 저희 동네 소방서에서 주최한 화재안전 페스티발 전경입니다. 여기엔 별도의 놀이기구는 없고, 사다리차나 소방차 크레인에 탑승해보기 정도의 놀이기구가 있죠. (무료!!!) 그리고 소방호스로 직접 물을 쏴서 불을 꺼보기 체험이라거나, 고속도로 인명 구조대의 차량 해체 시범, 아이들 대상 초간단 CPR 배우기 행사 등등이 있습니다.
키즈카페와 놀이공원에 익숙해진 아이들이 상당히 지루해 할 것 같지만, 그건 어른의 시각이고 아이들이 정말 좋아합니다.




위 사진은 인근 도시의 농장에서 열린 추수감사절 페스티발 전경입니다.
여기에 놀이기구는 지푸라기 더미를 쌓아올려 만든 언덕이라거나, 그 더미에 큰 고무관을 올려 놓아 만든 미끄럼틀, 지푸라기 더미로 만든 트랙터 모형, 닭/칠면조/토끼/염소/양/소/돼지 등이 있는 축사에서 동물들에게 먹이주기 (먹이는 따로 사야하죠), 옥수수 밭에 만들어 놓은 미로가 있습니다. 아이들만 좋아할 것 같지만 의외로 성인 커플끼리 와서 지푸라기 더미에서 서로 뒹굴고 잘 노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름이 되면 자주 찾는 곳 중에 하나가 동네 놀이터 중에 물놀이가 가능한 놀이터들 입니다.


한국에도 요즘 만든 아파트 단지에는 이런 놀이터들이 많죠?




또 물놀이터 외에도 위 사진처럼 여름철에는 도심에 있는 인공 분수대나 연못을 물놀이터로 개방하는 행사를 하기도 합니다. 이런 행사를 할 때에도 역시 물놀이터 주변에 푸드트럭과 야외무대가 같이 자리를 잡고, 보통 행사를 주관하는 지자체에서 (혹은 스폰서 기업에서) 사진에 보이는 것과 같은 고무 보트나 물총 등등을 무료 대여 혹은 제공합니다.





위 사진은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페스티벌인 Rib Festival입니다. 보통 일정 규모 이상의 Festival이 열리면 행사장 한쪽에 fence를 치고, 성인 인증을 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맥주를 팔고 마실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맥주를 파는 곳에는 어김없이 Rib을 파는 푸드트럭들이 자리를 잡죠.

Rib Festival에는 십여종이 넘는 Rib 푸드트럭들이 오고, 행사 기간동안 최고의 Rib을 투표로 뽑습니다. 그리고 다른 행사에 비해 상당히 넓은 음주구역을 갖추고 있죠.



특정 먹거리와 상관없는 행사들도 있습니다. 위 사진은 인근 conservation park에서 열린 Halloween 페스티벌 사진입니다. 공원 내 축사와 헛간 몇 곳을 놀이공원 유령의 집 처럼 꾸며 놨죠. Conservation Park는 원래 입장료가 있는 곳이라, 별도의 행사 입장료는 없었습니다.


이런 Festival을 하게되면 거의 빼놓지 않고 같이 오는 탈거리는 wagon ride입니다. 행사 종류에 따라 별도 탑승권을 판매하는 곳도 있고, 무료로 즐길 수 있는 행사도 있습니다.
위 사진은 아마 부활절 행사때 옥빌 지자체에서 진행한 easter egg 찾기 행사였던걸로 기억하는데, wagon ride가 무료였죠. 올드타운에서 진행된 행사라 따로 입장료도 없었습니다. Easter egg를 찾아내 받게되는 상품은 덤이고요.


겨울철이 되면 아무래도 야외행사는 진행하기 힘들어지기에 행사가 뜸해집니다. 고작해야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 Santa Festival같은 것이 열리는 정도죠. 그래도 위 사진처럼 실내에서 Super Dog Show 같은 이벤트를 동반한 실내 행사들이 간간히 열립니다.


그래도 정 심심하다면 실내 트램폴린, Rock climbing, 놀이터 등등의 유료시설을 이용 할 수도 있죠.

그리고 어른들에겐 좀 곤욕이긴 하지만, 너무 춥지않은 겨울에는 눈썰매를 끌고나가 언덕에서 눈썰매를 타기도 합니다.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 겨울철을 지낼만한 운동을 찾는다면 실내 스케이트장도 있습니다. 동네마다 커뮤니티센터가 있고, 커뮤니티 센터 2~3 곳 중에 1곳 정도는 아이스링크가 있습니다. 커뮤니티 센터 입장료는 지역주민과 지역외 주민간 차이가 있으니 거주지 지자체 커뮤니티 센터로 가는게 싸죠. 그리고 지자체 마다 다르지만 수영장 or 아이스링크 이용 쿠폰 묶음을 싸게 팔 때가 있습니다. 제가 사는 지자체에서는 할로윈 기간 전후에 그렇게 합니다. 이 기간에 살 경우 수영장 or 아이스링크 1회 이용 가격이 1인당 단돈 $1.50 $0.5 (재확인 결과 50센트네요. 업데이트 합니다) !!!

쓰다보니 결국 가족중심 activity들만 있네요. 제가 젊은 솔로일 때에 캐나다에 머문 것은 10여년 전 교환학생 시절에 벤쿠버에서의 삶이 전부인지라...
그래도 그 때에도 심심할 틈이 없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계 최고의 스키장 휘슬러에 UBC 학생할인 시즌패스를 끊어 놨기에, 주말이면 휘슬러로 올라가기 바빴고, 매일 아침이면 등교 전에 스탠리 파크에서 러닝이나 인라인 스케이트 타느라 바빴고 (간혹 다운타운 집에서 학교까지 인라인 타고 등하교 하기도 했고요), 주중에도 공부할 때 빼면 자취생인지라 요리와 청소 빨래로 바빴고, 또 살사댄스 클럽같은 학교 클럽에 가입해서 춤추고 노느라 바빴죠. ㅎㅎ

저는 좋아하지 않아 경험하지 못했지만 만약 낚시를 좋아하신다면, 호수가 많은 온타리오 주는 그야말로 낚시 천국이라고 합니다. 호숫가나 강가에 사시는 분들은 카약 한 대 사서 카야킹을 즐기는 분들도 많고요. 단, 온타리오에서 스키는 별로입니다. 눈은 참 많지만, 스키장을 만들만한 산이 없다보니 스키장이 별로 없고, 있어도 좀 빈약합니다.

캐나다에서 한국식으로 놀고 지내려하면 별로 할 일이 없을 수 있지만, 캐나다의 방식으로 놀면 심심하고 지루하지 않을 것입니다.

2016년 10월 9일 일요일

난 어떻게 취업이 된걸까???

처음 회사에 입사를 하고나서 3개월의 probationary 기간의 쫄깃한 긴장감을 겪고있었던 시절, 저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근데 왜 내가 취업이 된거지?"

영주권을 받고 이력서를 돌리기 시작했을 때 저는 일단 회사에 들어가면 일을 잘 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당장 실력이 좋아 가자마자 잘 할 자신이 있던것은 전혀 아니지만, 수 년 전에 제가 해왔던 개발자 세포 하나하나가 빠른 시일 내에 깨어나며 언젠가는 잘 할 수 있다는 자신이였죠.

하지만 동시에 취업을 할 수 있다는 자신은 없었습니다. 제 스스로 저를 돌아봐도 경력은 있으나 이미 5년 전 경력이고, 그렇다고 해도 그리 긴 경력도 아니고 4년 남짓의 경력일 뿐이고, 무엇보다 제가 해왔던 업무나 분야와 비슷한 직종은 찾기 힘들기에, 새로운 언어와 개발환경에서 일을 해야하는 것이 뻔했죠.

그러면 결국 엔트리레벨로 입사를 해야하는 상황일텐데, 엔트리레벨로 다른 경쟁자와 비교하자면 당장 컬리지 졸업도 안한 재학생인지라 처음 이력서를 작성하고 여기 저기 돌릴 때 부터 속으로 "안되겠지? 그래도 한 두번이라도 면접 걸리면 나중에 경험이 될테니 좀 해보자. 누가 알아? 이러다 덜컥 되버리면 좋은거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첫 구직에는 오랜시간이 걸린다는 많은 분들의 이야기 때문에 제 스스로 방어기재가 작동해서 자기 방어와 최면을 거는 것일수도 있죠.

그러다 처음으로 면접 기회를 잡은 곳이 지금 회사였습니다.

지금도 저는 면접 당일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면접 전부터 지원 포지션 상세설명을 잘 읽지않고 잘못 지원했던 포지션이였고, 전화 통화로 진행했던 스크리닝 인터뷰 때 전혀 경력도 없는 Java쪽인 안드로이드 개발 포지션도 제안 받았으며, 막상 면접에 도착해서는 제가 안드로이드와 Java쪽으로는 정말 쑥맥이였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만 하고 나오는 면접이였습니다.

진짜 마지막 VP 면접에서 VP가 같이 일하자고 말하기 전까지는 속으로 계속 눈물만 흘리며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죠.

"이미 답은 다 정해진 것 같은데, 여기 더 이상 남아서 인터뷰 볼 필요가 있나? 
그래 맘을 비우자. 처음부터 경험삼아 해보는거였자나. 괜히 욕심 부려서 맘만 상하지 말자. 
경험삼아 보는거니까 일단 계속 남아있자... 
면접 할 때 물어보나 하나하나 다 기억해두고 적어두고 나중엔 이런거 다 공부 한 다음에 면접보자.
그런데 집에는 뭐라고 말해야하지???"

그렇게 너무나도 운이좋게 직장을 구해서 일을 시작했고, 처음 일을 시작하며 Java라는 언어와 요즘의 개발환경, 그리고 프로세스에 어색해 하며 모르는 것 하나하나 구글링 해가며 감을 잡아가던 시기에도 '그런데... 내가 왜 뽑힌거지?' 라는 생각은 계속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회사를 떠나게 될 때, 혹은 내 매니져가 나보다 먼저 회사를 떠나게 될 때, 한 번 물어보자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팀런치를 하러 밖에 나가게 되었고 어쩌다 이야기가 각자의 이민 이야기와 처음 직장을 구할 때 에피소드 등으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저나 제 매니져가 회사를 떠나는 상황은 아니였지만,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다보니 저는 오래된 궁금증 하나가 다시 떠올라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내 오래된 궁금증 하나가 떠오르네?
알렉스, 기억 날 진 모르겠지만 내가 여기 처음 죠인할 때 기억나?
너 왜 날 뽑았었니???
난 경력이 있긴 했지만, 이미 5년도 지난 오래전 경력이고, 그나마도 4년 남짓으로 짧았고, 안드로이드는 커녕, 자바도 제대로 된 경험이 없고, 시니어도 아닌데 원래 시니어 포지션 포스팅에 지원한 거자나. 
더구나 솔직히 인터뷰 과정도 난 완전 엉망이였다고 생각했거든. 
너 왜 날 뽑았었니?"

이미 2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지라 사실 매니져도 당시의 상황을 전부 기억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제 인터뷰 과정에서 안드로이드 팀과 Windows팀 양쪽에서 동시 인터뷰를 진행하는 등, 몇 가지 특이한 상황이 있었던지라 그와 관련해서 하나 둘 씩 어렴풋한 기억을 꺼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특유의 솔직함으로 기억하는 바를 털어 내더군요.

"먼저 이유가 어찌되었던, 당시 면접 전에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라면 Junior 포지션으로 뽑기로 이야기 되었었어. 분명 선입견이긴 하지만, 한국사람이라 잘 따를꺼라 생각했고, 그래서 junior로는 적절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어."

"회사가 커지며 업무가 많아지니까 중급 아니면 고급 개발자가 필요한건 맞긴 했지만, 당시에 사람 찾기는 어려웠고, 있던 사람들이 오히려 나가고 있었지. 스티븐이랑 (윈도즈팀 매니져), HR이랑 이야기 하다가 그랙 괜찮다면 쥬니어로 받아보자 지금 당장 사람 필요한데 그렇게라도 사람 받아서 일해야지 라고 정했었어"

"네가 진행했던 기술 인터뷰 내용들은 내가 지금 기억이 안나. 얼마나 잘했었는지 못했었는지. 그런데 확실한건 기술 인터뷰들을 진행했던 interviewer들의 평가가 괜찮았다는거야.
처음부터 시니어 받는거라면 인터뷰 질문 과정들에 답변을 얼마나 잘하냐. 시니어로서 알아야만 할 만한 질문들에 다 대답을 하는지가 중요해. 그런데 넌 쥬니어 수준으로 면접 시작 한 거자나. 그러면 네가 얼마나 많이 정답을 맞췄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아, 그러고보니 몇가지 생각나는 피드백이 있었고 다들 그걸 좋게 생각했어. 어떤 질문들이 주어졌을때, 너는 '몰라' 라고 이야기 하면서, '예전에 이런거 했는데 그거 비슷한 것 같다. 이것도 이런 식으로 풀어나가면 되지 않을까'. '똑같은 개념은 아닌것 같은데 C에 있는 이런거랑 같은 방식으로 쓰이는거 아니야?' 등등, 몰라도 그냥 모르고 끝나거나, 모르는 것에 대한 변명을 하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을 해보는게 좋았다. 시니어 면접이였으면, 이것도 모르면서 시니어야? 했겠지만, 쥬니어이기에 이런 접근 방식들이 좋았다"

"그리고 오스카 (당시 CTO)가 면접 전에 네 이력서 보고 맘에 들어하더라. 개발과 PO경력 둘 다 있다고. 개발자로서 PO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고 우선순위에 대해 명확할 거라고. 그리고 개발자로서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진척을 보이지 못한다면, 시간이 지나 우리 회사 제품에 익숙해지고, 만약 말도 좀 된다면, PO 포지션으로도 쓸 수 있을 가능성도 있다면서."

사실 위 이이야기는 면접 과정에서 오스카가 제게 '난 니가 개발과 PO경력 둘 다 있는 것이 맘에 들었다' 정도로 간략하게 말 한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엔 그냥 립서비스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냥 솔직히 이야기 했던 거였네요.

어찌되었건 지금은 매니져가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기억을 못하지만, 정리해보니 역시나 저는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실수로 시니어 포지션에 지원한 것이지만, 회사에서 마침 사람 부족한데 구하기는 힘들다보니 쥬니어라도 사람 괜찮아 보이면 채용 해보겠다고 매니져들이 결정한 것은 누가 뭐래도 100% 운이죠.

누가봐도 개발자로서 경력단절인 지원자였지만, 회사가 커지며 PO역량 또한 중요시 되고 있던 시점이였고, 당시 CTO가 PO와 개발을 모두 담당했었기에, VP가 보기엔 제가 오히려 괜찮을 수도 있는 멀티 플레이어 카드였습니다.

또한, 정말 고마운 분들은 저보다 먼저 제 회사를 거쳐갔던 많은 한국인, 혹은 한국 출신 선배들입니다. 그 분들 모두 남들과 다투기 보다는 따르는 편이였고, 일을 하면서 입으로 싸우기 보다는 코드로 싸웠고, 좋은 성과와 평가를 남기고 떠나셨기에 제 매니져에게 좋은 선입견을 심어준 것이죠. 만약 그 분들이 게으르고, 말만많고 결과는 없고, 분란을 조장하고 떠났다면 제 면접에 악재가 되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 역시도 제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그저 운이라 할 수 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예전에 유럽쪽의 소도시로 유학을 가셨던 어떤 분이, 외국에 나가서 한 사회에 정착하여 장기간 소수민족/소수인종으로 지내면서 겪게되는 어려움 중 하나는 나 하나라는 개인이 우리나라/우리민족/우리사회라는 대표성을 가지게 된다는 부담감이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식이건 선입견이란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능한 저를 경험했던 다른 사람들이 한국인, 한국출신 사람들에 대해 좋은 선입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기도 했습니다.

아 그리고, 제가 학교 다닐 때 같이 입학했던 친구들이 이제 졸업한지 9-10달 정도 지났는데, 이제 제대로 된 개발자 포지션으로 구직 소식이 하나 둘 씩 페이스북을 통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아직 소수의 학생들만 개발자 포지션을 구직 했지만, 첫 커리어를 구하는 것은 적어도 반년에서 일년은 보통 걸린다는 말이 진짜인 것 같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