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8일 토요일

영어를 못해서 대인배가 된 사연

안녕하세요.

영어를 못해서 조금 답답한 일들은 그간 많이 겪어봤지만, 영어를 못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 저 외에 모든 팀원들이 out of office이기 때문인데, 한 명은 컨퍼런스 참석으로 자리를 비웠고, 다른 2명은 이번주 내내 휴가이고, 나머지 한 명은 섬머쟙으로 갓 들어온 인턴인데, 수요일부터 2주간 휴가입니다. 

그렇다보니 지난주부터 시작된 이번 스프린트를 계획할 때 평소대비 일의 양을 절반수준으로 잡아 계획된 업무 처리에는 큰 문제가 없긴 했는데, 문제는 옆에서 치고들어오는 이슈들이였습니다. 각 유관부서에서 저희 팀에 요청을 한다거나, 저희 팀이 관리하는 서비스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불끄러 나가야 한다는 등의 일들을 저 혼자서 다 해야하다보니 이번 주 내내 이런 '잡무'들로 평소보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런 와중에 지난 주 수요일에 제가 예전에 소속되었던 개발팀에서 메일이 하나 왔습니다.

어젯 밤 늦게 (메일 작성 기준) 릴리즈를 앞두고 300여개가 넘는 모든 variation들을 전부 빌드하는 full build job을 실행시켰는데, 저희 팀에서 관리하는 외부 서비스 미러링 서버에서 time out이 발생하는 바람에 총 7시간이 걸린 빌드가 막판에 fail이 나버렸다는 메일이였습니다.

그 당일에는 다른 불을 끄느라 바빠 미처 메일 확인을 하지 못했고, 다음 날인 지난주 목요일에 처음으로 메일을 읽었는데, 이미 이틀 가까운 시간이 흘러버려 저희가 관리하는 미러링 서비스에서는 일부 로그들이 자동으로 삭제가 된 상황이였죠
그래서 간략하게 문제 상황과 fail된 빌드의 로그 등등을 확인해 본 후에, 이런저런 상황 설명과 함께, 정황에 근거하여 문제가 발생했을 때 fail이 되지않고 자동 복구가 가능한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가능 할 수도 있는) 방법 등을 설명하여 메일을 보냈고, 몇 시간 뒤 다시 그 팀의 개발자 중 한명인 OOO은 제가 제안한 방법들의 side effect들을 이야기 하면서, 자신들은 time out이 발생하지 않는 reliable한 서비스가 필요하고, 현재의 서비스가 그렇지 못하다면 별도의 서비스 셋업을 고려해야한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그 답장을 보기는 했지만, 저는 또 다른 불을 끄고있던 상황인지라 당장은 대응을 하지 않았고, 끄고있던 불을 다 해결 한 이후에 다시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저런 분석을 하다보니 저희가 제공하는 미러링 서버의 특성과 그들의 빌드 시스템의 특성 상 제가 제안한 대안 중 한 가지의 적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발생한 문제 케이스에서는 특히 그러했죠. 그래서 관련 로그와 분석내용, 관련 코드의 일부를 캡쳐한 부분 등을 정리하여 정확한 원인과 그 원인에 따른 대안 제시를 하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 짓고 그간 밀린 메일과 메신져 메시지들을 하나씩 열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수신함의 마지막 메일을 보니, 미러링 서비스 관련하여 문제가 되었던 그 팀의 매니져에게 온 메일이였습니다. 메일 수신시간을 보니 제 분석 메일의 발신시간 직전이였죠.

혹시 제 문제분석에서 누락된 것이 있지않을까 생각해 메일을 열었는데, 수신인에 저만 단독으로 있었습니다. 

'문제 해결책 의견을 주고받는데 왜 나한테만 보냈지?' 

약간 의아한 생각을 가지고 메일을 읽지 시작했는데, 제 생각과는 달리 사과 편지였습니다.

우리 팀 OOO이 보낸 메일에 대해 사과한다. OOO이 너한테 따지거나 항의하거나 비난하려고 메일을 보낸 것도 아니고 너한테 화가 난 것도 아니다. 너한테 지금 화가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 자체에 대해 화가 난 상황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표현이 잘못된 것 같다. 매니져로서 내가 대신 사과한다. 지금 OOO이 너한테 이거 고쳐달라고 떼쓰는게 아니고 이런 상황이 발생하여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문제 분석의 도움을 받아보고자 하는 것이였지 절대로 너나 너희 팀을 공격하고자 한다거나 너에게 해결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의도가 아니였다...

뭐 이런 내용이였습니다.

처음에 메일을 훑어보면서 잘못보낸 메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제가 누구에게 비난을 받거나 공격을 당했다거나 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메일 본문 아래로 이전 메일 thread가 있어 스크롤 해보니 제가 그 팀 개발자들과 주고받은 메일 내용이 맞았습니다.

'뭐지?'

'뭔 말이지??' 

'누가 나 공격했었어???' 

'나 맞은 적이 있던거야????'

'내가 정녕 사과받을 만한 일이 있기는 있는거야?????'

혹시나 제가 읽지않고 실수로 삭제한 메일이 있다거나, 업무 메신져에서 놓친 글이 있는지를 다시 찾아보았지만, 딱히 그럴만한 사건이 보이지 않았죠.

그 팀은 1년 반 전만 해도 제가 소속되었던 팀이라 대부분 다 친분이 있었기에 다른 팀원을 통해 제가 보낸 분석 내용에 대한 의견 확인을 하는 척 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은근슬쩍 떠 보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팀에서 마지막으로 OOO이 메일을 보낸 후 몇몇 사람들이 수근거렸다고 합니다. 너무 강압적이고 공격적으로 메일을 작성했다고요. 그래서 OOO과 팀리드, 매니져 등등이 관련해서 이야기도 몇 번 했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다시 읽어봐도 저의 영어실력에는 그냥 7시간 걸린 빌드에서 막판에 문제가 발생했으니 빨리 문제 수정을하자는 메일로만 보이고, 딱히 저를 비난한다거나 쫀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데 원어민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봅니다.

그러면서 그 친구가 본인 같으면 성질나서라도 아무것도 안 해줄텐데 저보고 대인배라고 합니다.
진짜 대인배가 아니였고 그냥 이해를 못해서 그런 것이였던지라 생각나는대로 횡설수설 아무말이나 막 했습니다.

'OOO이 화가 날 만도 하지. 이해해. 7시간 넘게 걸리는거라 밤새 돌렸는데, 에러 떴고, 그거 다시 하려면 또 밤에 해야해서 다시 하루가 흘러가는 거고. 어찌되었건 우리팀 responsibility 아래있는 서비스에서 time out이 발생한 것이 직접적인 현상이였고....'

제 횡설수설에 그 친구가 너무 쿨하다고 하네요.




그 친구와 이야기를 한 후 다시 돌아와 메일을 보니, OOO이 수신인을 저로만 설정해서 지난번 자신이 보낸 메일에 대한 excuse와 함께 Sorry 레터를 보냈습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팀의 매니져가 다시 한 번 Thank you & Sorry 레터를 보내더군요.

허허허...

참 기분이 오묘했습니다. 무언가 뿌듯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씁쓸하기도 했죠.

저의 일반적인 성질머리를 생각한다면, 메일을 읽고 원어민들이 느꼈던 그런 감정을 저도 느꼈더라면 결코 이번처럼 대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나 계속해서 외부 요청들이 저에게만 깔대기처럼 몰리고 있는 이번 주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화끈하게 맞대거리를 한다거나, 아니면 메일을 읽지도 못했고 뭔지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무시를 했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저의 부족한 영어실력 덕분에 저는 대인배가 되어버렸습니다.

문화적 차이 때문인지 절대적인 언어실력의 부족 때문인지, 문맥상 전해지는 감성을 캐치하는 언어적 센스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의 복합작용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 다시 OOO이 보냈던 원래 메일을 읽어보아도 도무지 제가 공격을 받았다거나, OOO이 저에게 화를 낸다거나 저를 비난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네요. 어쩌면 한국의 회사생활을 하면서 받았던 다양한 방법의 갈굼들과 압박에 익숙해져 이 정도의 공격에는 흔들리지 않는 내구성과 면역력이 생긴 것일 수도 있고요.

여하튼 영어를 잘 알지 못해서, 잘 하지 못해서 궁극적으로 좋은 결과가 나온 저의 유일한 경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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