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30일 일요일

일하는 보람 ≠ 노동의 보상

안녕하세요. 갈 수록 블로그 포스팅이 뜨문뜨문 이뤄지는 것 같네요.

아무래도 점점 이 곳에서 삶에 적응이 되어가다보니, day to day life에서 겪는 일들의 신선도가 이전만 못하여 그에 따른 감흥이 적어지고 있어서일 수도 있고, 제 자신의 뒷치다꺼리도 잘 하지 못하고 있어서 일 수도 있고요.

오래간만에 제 근황을 말씀드리자면, 작년 이맘 때 부터 시작 된 저의 고민을 아직까지도 해소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처음 만큼 고민의 심각성이 깊은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도 그 고민은 제 주변을 계속해서 맴돌고 있네요. 그렇다보니 저의 작년 이맘 때 적은 글과 거의 동일한 내용이 될 것 같지만, 그래도 내년에는 무언가 더 발전하고 변화되기를 기대하며 요즘 저의 근황을 남겨봅니다.

먼저 작년과 큰 변화가 없는 근황들을 풀어봅니다.

올 해에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회사 MVP에 노미니 되었습니다. 그리고 올 해에도 작년과 같이 노미니까지가 한계였고 MVP 수상을 하지는 못했네요.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작년에는 노미니 되는 순간부터 MVP에 대한 욕심이 컸습니다. 아무래도 입사 직후 저의 개인 목표가 MVP는 한 번 받아 보는 것이였으니까요. 하지만 올 해에는 MVP 선정과정에 대한 내막을 조금 알게되어 그다지 욕심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이야기 하자면, MVP 선정 프로세스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되었고, 현재의 회사 권력구조 변경 이후 현실적으로 수상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미리 포기를 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네요.

그래도 사람 욕심이라는 것이 있으니 내년 이맘 때 쯤에도 지금 이 회사에 남아있다면, 내년에는 MVP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작년 말 부터 시작된 제 고민 중 하나는, "내 능력에 맞는 몸값을 받고, 내 몸값에 맞게 일하기"인데, 세부적인 고민은 조금 바뀌었지만, 고민의 전체적인 틀은 아직까지 그대로입니다.

오롯이 저의 생각이긴 하지만 회사에서 나름 괜찮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제 스스로 내린 진단은 상당한 거품이 있는 과대평가입니다. 제 능력에 맞는 성과를 냈다고 말하기는 힘들고, 약간의 워커홀릭적인 개인 성향 + 업무 변경 후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분야들을 공부하면서 오버 페이스로 일을 하다보니 제 능력치를 상회하는 성과를 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연봉을 올리거나 더 많은 성과를 얻기 보다는 이제 서서히 제 능력에 맞춰 일하면서 연착륙을 하고 싶다는 것이 저의 바램이죠.

그래서 작년 이맘 때 즈음 정한 저의 올 해 목표는 이것 저것 다 내려놓고, 해고되지 않을 만큼만 일하자는 것이였지만... 결국에는 제 욕심 + 주변의 기대치 + 쓸데없이 과도한 책임감 등등에 짓눌려 지난 1년간 뭐 하나 내려놓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 하자면 지난 1년간 제가 짊어져야 하는 것들은 오히려 더 늘어났고, 예전에는 한 달에 1-2 주 정도 열심히 달리고 나머지 2-3주는 조금 빠르게 걸어가면 일을 처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1 달 내내 전력질주를 해야만 합니다.

언제쯤 내려놓고 비우는 법을 배울 수 있을지...

그나마 다행인 것인, 이제는 저희 부서에 매니져도 왔고, 매니져 역시 제가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음을 알고 어떻게든 분배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의 머릿 속 계획이고, 실제로는 업무 분할과 이전을 위한 실질적인 action은 아직 없습니다. 아무래도 주어진 기간 내에 계속해서 부서 성과를 내야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이겠죠.

그리고 작년과 마찬가지로 이번 연말/연시에도 중남미로 잠시 휴양을 떠납니다. 제가 방전되어 번아웃이 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어릴적 저의 여행 스타일은 돈이 있으면 자연과 함께 Extreme sports 즐기고 주머니가 넉넉하지 못하면 역사적/문화적 유적지를 찾아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고 발품팔고 사람들 만나는 여행이였는데, 지금은 그냥 상대적으로 물가 저렴한 중남미 휴양지를 찾아가서 아무 생각없이 먹고 쉬고 놀다오는 것이 최고가 되버렸네요. 제 아내가 원래부터 휴양지를 더 선호하는 스타일이라 저와 달랐기에, 신혼 때 생각 한 것이 제 아내를 조금씩 변화시켜 제 쪽으로 끌어오는 것이였지만, 오히려 제가 제 아내에게 동화되어 버렸습니다.

작년과 다른 점들을 찾자면 우선 올 해에는 크리스마스 기간에 집에서 머무르지 않고, 잠시 뉴욕에 다녀왔습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패키지 일정이지만, 타임 스퀘어, 자연사 박물관 등등 다양한 곳에 들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요즘 읽는 책들에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뉴욕이라는 도시를 직접 보게되어 매우 기뻐하는 모습에 나름 보람을 느꼈습니다.


캐나다에서 일을 하다보면 종종 뉴욕에 있는 회사에서 인터뷰 제안이 오기도 합니다. 페이는 확실히 캐나다 대비 2배 이상 되긴 하지만, 가족의 삶의 환경으로는 아무래도 캐나다가 나은 것 같아 이에 응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총기사고 등 치안 문제도 걱정이 되었고요. 하지만 막상 가보니 맨하탄의 치안은 생각보다 좋더군요. 어릴적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던 마피아나 갱단의 전투, 지하철에 있는 무법자 등 뉴욕의 치안 문제는 모두 옛날 이야기라고 하더군요.
또, 아무래도 GTA보다 시장이 크다보니 맨허턴의 한인 거리에는 캐나다에서 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파리바게트, 뚜레쥬르, 카페베네, BBQ 치킨 등, 익숙한 한국 브랜드들이 있어 부러웠죠. 어쩌면 이런 한국 기업들의 진출에 뿌리가 된 것은, 수 많은 한인 이민 선배님들이 노력하셔서 그 비싼 맨허턴 노른자위 땅에 한인 거리를 만들어 냈기에 가능한 것일텐데, 참으로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뉴욕에서 일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페이가 2-3 배가 되더라도 생활물가가 워낙 비싸다보니 가족을 꾸리고 살기에는 삶이 질이 캐나다보다 높기 힘들것 같아서요. 뉴져지 통근은 어떨까 싶어 뉴져지 집값도 찾아봤는데, 기차 통근이 가능한 지역 집값은... OTL.
뭐... 연봉을 million 정도 준다면 모를까, 뉴욕으로 이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가장 결정적으로 작년 이맘때와 다른 것은 더 바빠졌고 더 많은 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이지만, 작년처럼 방전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제 스스로 오버 페이스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있기에 방전 직전이 되면 재택근무를 하면서 어떻게든 초절전 모드로 단 하루라도 휴식을 취하곤 했고, 올해 초 부터는 절대로 (까지는 아니고, 가능한) 휴일과 휴가 기간에는 업무를 본다거나 업무 관련 공부를 하지 않았고, 휴가기간에는 회사 메일/메신져 앱도 폰에서 잠시 꺼 둔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또 다른 변화 한 가지가 있다면 이제는 저도 매니져가 있습니다. 이전 매니져와는 다르게 실무 개발 백그라운드가 없어 기술적인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낮지만, 일반 매니징 관련 사항에 대해서는 정말 맘에 듭니다. 단, 기술적 이해도가 낮다보니 저를 너무 자주 찾아 제 업무의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많긴 한데, 앞으로 몇 달 정도 지나면 나아지려니 하고 믿고 있습니다.

또 매니져가 있다보니 저에게 걸린 오버로드를 알아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도 차이점이지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 오버로드를 고르게 분산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히 있고, 또 그간 저에게 오버로드가 걸려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제 compensation을 알아서 조정 해 주겠다고 하네요.

아직 구체적인 제안은 받지 않아 어느정도 조정을 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기분 좋은 일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도 현재 저의 개인적인 고민과 목표때문에 금전적인 보상을 더 받게된다면 제 스스로 목줄을 한 칸 더 줄이는 꼴이 될 수도 있기에, 가능하다면 연봉 인상보다는 휴가일수 증가 혹은 다른 베네핏 조정을 해달라고 말은 해 두었습니다. 만에하나 금전적인 부분만 가능하다면 연봉보다는 보너스가 더 좋다는 이야기도 했고요. 어찌될지는 더 기다려 봐야겠죠. 뭐, 매니져는 의지를 가지고 조정을 해보려 했으나, 인사나 개발 VP가 반대해서 안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오랜기간 동안, 일하는 보람에 너무나 목말라 있었기에 초반 몇 년간 열심히 달렸는데, 그 때 오버 페이스를 했고 그 오버 페이스가 너무 습관적으로 되어버려, 이제는 그에 따른 보상에 대해서도 부담을 느끼는 것이 조금은 안타깝지만,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이 있고, 그 직장에서 저를 인정 해 준다는 것은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죠. 

올 해에는 매니저의 의지도 있으니 제 업무 페이스는 조금씩 늦추면서 제 능력은 조금씩 더 끌어올려 여유롭게 일을 하면서도 비슷한, 혹은 더 나은 성과를 만들어 내자는 저의 목표에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 해 봅니다.

늦었지만 모두들 Merry Christmas 하셨길 바라며, 2019년 새 해에 바라시는 일들을 모두 이루시길 빕니다.

2018년 10월 26일 금요일

Work smart v.s. work hard

오늘 회사 오피스와 회사 서버들이 있는 Data Centre간 네트워크가 다운되어 하루 종일 아무 일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네트워크 자체 문제라는데, Bell 엔지니어들이 와서 고치고 있지만 아침에 터진 문제는 퇴근 시간까지수정되지 않았고 하루 종일 놀고있는 상태네요.

아직 모두가 출근하기 전인 오전 9시 즈음에 문제가 생기자 사람들은 삼삼오오 탁구대나 푸즈볼 테이블, 키친에 모여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습니다. 점심시간 가까이 되어도 복구가 되지 않자 수다를 떨고, 푸즈볼을 하는 것도 지쳤는지 키친에는 빈자리가 하나 둘 씩 늘어났고, 대부분 자기 자리로 돌아가 웹 서핑을 시작하더군요. 그리고 또 시간이 더 지나자 하나 둘 씩 조기 퇴근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오후 1시에도 아직 정확한 문제나 복구 예정시간이 나오지 않다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 보다는 퇴근하는 편을 선택한 것이지요.

저 역시도 원래 출근일에는 점심을 거르는 편이지만 할 일이 없어 팀원들과 점심 외식도 하고, 웹서핑도 하고, 수다도 떨며 너무나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도무지 조기 퇴근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에하나 곧 네트워크 복구가 된다면, 곧바로 대응해야 할 일들도 있고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적어도 제 근무시간에는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자리에 앉아 혼자 이것저것을 하고 있는데, 다른 팀 매니져가 지나가다가 저에게 말을 건냅니다.

    "Why are you still here?"

    "Cause I'm so busy to find to do something during this idle time."

    "Oh, man. You are so hard worker always."

워낙 그 친구도 저도 지금 할 일이 없어 심심하던 차에 농담으로 시작된 대화는 회사 구석 구석을 옮겨 다니며 계속 되었습니다.

잠시 시계를 돌려 한국에 살 때로 돌아가보죠. 당시 한국 회사 인사팀에서 항상 하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Work hard하지 말고, work smart를 해라."

정작 웃긴 것은 이 말을 하는 인사팀 역시 개발실 만큼은 아니지만 거의 항상 야근을 하고 있었고, 주말이면 임원회의 준비 때문에 출근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work hard를 하기는 싫었지만, 회사 프로세스나 주어지는 일의 양이나 위에서 지시를 따르다 보면 work hard를 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정말 언행불일치라고 생각 했었죠. 회사에서 정말 천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smart 한 사람들도 많이 봤지만, 근무 환경과 시스템이 그렇다보니 그들 역시 work hard를 했고, 어떻게 하는 것이 work smart인지 알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캐나다로 이민을 오면서 평균 근무시간은 더 짧으면서, GDP는 한국보다 더 높은, 이른바 선진국 중 하나인 캐나다에서는 과연 어떻게 일을 하기에 work smart가 되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기본적인 비교를 해 보자면 캐나다 직장생활의 근무시간은 짧았고, 한국과 달리 출퇴근 시간에 대한 별도의 확인도 없었으며, 근무시간 중에도 내가 무엇을 하건 아무런 간섭도 안하고, 공식적/암묵적인 잔업 요청/강요도 없습니다.

초기에는 이런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일단 3개월 probation 통과가 목표였으니 work hard를 했지만, 어느정도 자리가 잡히자 work smart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일단 work smart를 어떻게 하는지 제가 잘 모르기에 자타공인 일 잘하고 똘똘하다는 친구들을 하나씩 하나씩 관찰하면서 제 롤 모델로 삼으려 했죠. 

하지만 관찰하면 할 수록 work smart가 무엇인지 더 알기 힘들었습니다.

예를들어 평소에 10시 즈음 출근하고 왠만해서는 늦어도 4시 30분에는 퇴근하는 동료가 있습니다. 어떤 일이 주어지더라도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는 인정받는 실력자였고요. 한번은 신규 프로젝트 셋업을 그 친구와 함께하게되면서 pair programming을 하기로 했고 출근하면 같은 PC 앞에 앉아서 서로 이야기하면서 하나씩 코드를 작성 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처음에 저희가 논의했던 구조를 적용하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했고 한동안 서로 의견을 주고받다 오후 4시가 되어 그 친구는 먼저 퇴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pair programming을 하려는데 그 친구가 어제 발견한 문제의 해답을 이야기 합니다. 이론적으로 맞는 것 같지면 몇몇 우려되는 점들이 있어 이에대해 이야기 하자, 자신이 테스트 한 것을 보여줍니다. 테스트 데이터들을 보아하니 어젯 밤에 퇴근 후 혼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pilot 코드를 짜고 직접 검증까지 해 본 것 같더군요.

네, 그랬습니다. 겉보기에는 하루 6시간 정도만 일을 하고 퇴근하는 것 같았지만, 퇴근 후에도 항상 혼자서 이것저것 공부를 하거나, 연구를 하거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친구 외에도 동료들 중 소위 잘나간다는 친구들을 뜯어보니 퇴근 후에 지속적으로 일이나 연구를 하는 동료들을 많이 찾을 수 있었죠. 물론 동료들 중 과반수 이상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마치고 퇴근 이후에는 메일이나 메신져 확인조차 안하지만, 이른바 '잘나가는' 친구들은 퇴근 이후에도 무언가 하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행여 무언가 긴박한 일이 있어 메신져나 메일을 보내면 거의 즉답이 왔죠. 결국 근무시간이 짧다 해도 사무실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는 시간만 짧은 것이지, 실제로 일을 하고있거나, 업무와 관련된 연구/고민을 그 외의 시간에 스스로 하고있는 것이였죠.

흠... 그렇다면 과연 work smart란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work smart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들을 하다가, 결국에 정답은 work hard인 것인가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제가 팀을 옮기며 다른 팀으로 가게될 때, 이전팀 매니져와 인사를 주고받으며 조금이나마 단서를 얻은 것 같습니다.

"I was happy to work with you. You are very hard worker, and you are smart. Not really genius level smart, but at least you are smarter than average developer, and you are fast learner." - 아... 쓸데없는 too much information. 그냥 you are smart에서 끝났으면 좋았을걸.

"Just keep going, keep improving. And I believe you will be good at your new team as well. Any manager will like you as you are working so hard and doing things well."

흠... 그래... work hard를 좋아한단 말이야?
팀을 옮기고 몇달이 지난 후, 회사 보드게임 night에서 1:1로 카탄 게임을 하다가 넌지시 물어봤습니다.

"As a manager, which developer do you prefer? Hard worker? or Smart developer?"

과연 대답은 무었이였을까요?

대답은 work hard를 하건, genius건 상관 없이 더 많고 정확한 아웃풋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랍니다. 아하... 이런 우문현답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렇게 혼자 머리를 탁 치는데, 한가지 더 이야기를 합니다.

"But. But. If both are making same amount and quality of output, I do prefer....."

저는 이 때 즈음에, 'Smart Worker'라고 예상을 했습니다만, 대답은 'Hard Worker'였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hard worker를 옆에서 보면 다른 동료들도 보통 자극받아 더 열심히 하기도 하며, 때로는 천재성으로 돌파할 수 없는 난제가 나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에는 끊임없이 두드리는 근면함으로 무장한 hard worker가 더 필요한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그 날 이후 회사에서 매니져인 동료들과 이야기를 할 때 간혹 hard worker v.s. smart worker를 물어보곤 했습니다.

결론은 다들 대동소이 했는데, 결국 퍼포먼스가 잘 나오는 사람이 좋다는 말이였습니다.
그리고 심화 질문인 같은 아웃풋인 hard worker와 smart worker에 대한 질문에는 아웃풋만 동일하다면 아무상관 없다는 대답이 가장 많았지만, 구지 둘 중 하나를 꼭 고른 답변들 중에는 의외로 hard worker를 더 선호하는 경우가 더 많았죠.

이유는 여러가지였는데, smart worker지만 자기 손을 더럽히기 싫어하는 스타일이면 잘못을 지적하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잘하지만 직접 뛰어들지는 않기에 기꺼히 자기 손에 피를 묻힐 (영어로는 손일 적신다고 표현하는 것 같더군요) 사람이 필요하다, 고과 평가시 좀 더 smart하게 일을 잘 한 사람보다는 정말 hard working 한 사람이 더 편하다는 답변도 있었고, 조금 재미있는 답변으로는 스마트한 개발자들은 나랑 일하면 답답한지 일찍 회사를 떠난다는 답변도 있었습니다.
또 제가 듣기에 흥미로웠던 부분은 고과평과 관련된 이유였습니다. 좀 더 스마트해서 일을 잘하는 팀원이 있는 경우 고과면담을 해보면 다른 팀원들이 대부분 자기 자신이 그보다 더 잘하거나 적어도 그 개발자 만큼은 한다고 생각하지만, hard working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대부분 '내가 그래도 그 친구 만큼 일을 많이 해내지는 못하지...' 라고 생각한다고 하네요.

오늘도 그 친구와 같이 커피도 마시고 푸즈볼도 하며 돌아다니다 work hard vs smart 주제가 생각나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친구의 답 역시 성과만 잘 나오면 된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인사팀에서는 "No work hard, work smart"라고 이야기하지만 내 상관들은 work hard를 시켰다는 이야기를 해주자 이런 말을 하더군요.

"Work Smart라는 건 없는거 아니야? 원래 smart한 사람은 더 빨리 일을 해내서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성과를 내는거고, work hard한 사람은 조금은 느리더라도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더 많은 성과를 내는거지. Work well은 몰라도 모두가 smart하게 할 수는 없자나. 각자 역량이지. 만약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의미의 smart라면 그건 시스템과 프로세스가 smart해야 하는 것이지 사람은 smart하지 않은데 일을 smart하게 한다는게 말이 안되는 것 같네."

그 친구와 다른 대화를 계속 하면서도 이 말이 계속 제 머릿 속에 맴돌았습니다.

그렇게 사무실과 그 주변을 모두 돌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그 친구가 묻습니다.

"이제 집에 갈껀가?"

"아니, 만약에 네트워크는 복구 되었는데 우리 서비스가 뭔가 고장났다면 바로 고쳐야 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 기다려 봐야지. 그 동안 다른 밀린 메일도 보면서 기다리려고."

"난 너의 이런 work ethics가 참 좋아. 이게 바로 work well이지."

흠... 결국 제가 퇴근을 할 때 까지 네트워크는 복구되지 않았고, 오늘 하루 제가 만들어 낸 output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work well에 들어간다면, 결국 매니져들이 생각하는 work well이라는 범주에는 work hard가 포함되는 것이고 구지 한국 회사에서 정신교육 했던 내용과 매칭시켜 보자면 자기 업무에 대한 주인의식입니다.
종합해보면 한국에서나 캐나다에서나 좋아하는 직원은 다 매한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을 선호하고, 자기 일과 회사에 대한 애착과 열정이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합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에서는 일에대한 욕구와 열정이 넘치는 사람에게나 부족한 사람에게나 모두 평등하게 잔업과 특근을 요구했었고, 진취적인 도전의식이 없는 사람에게도 다소 무리가 되는 양의 업무를 던져 주었습니다. 만민에게 평등하게요. 캐나다에서는 욕구와 열정이 넘치면 얼마든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열어두지만, 없다면 그냥 기본만 하도록 놔둡니다. 대신 그 만큼 더 많은 일을 해 낸 사람에게는 그에 맞는 보상을 해주고 기본만 한 사람의 연봉은 동결이 되지요. 한국에서 연봉은 개인별 성과에 따른 차등이 약간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연차에 따라 직급이 정해지고 직급에 따라 연봉이 결정되기에 열정이 있는 직원들은 더 뛰어 갈 수 있게 도와주고, 열정이 없는 직원들도 '잘 나가는' 직원들이 받는 보상을 보고 자극받아 더 좀 더 분발하도록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보니 모두에게 평등하게 전원 달려가도록 회사 시스템이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인터넷에서 한국인이 해외 취업이 되어 일을 하는데, 야근을 하는 것을 보고 회사에서 우리 회사의 철학과 근로문화에 반한다며 경고를 주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Probation기간 중 짤리지 않기위해 work hard harder hardest를 할 때에 만에하나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했는데, 요즘 생각에는 이런 것은 걱정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건 남들보다 더 많은 성과를 내면 모두 좋아하며, 그 와중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일을 해 나아가면 더욱 더 좋아합니다. 적어도 제가 일하는 지금 이 회사에서는요.

저 처럼 언어가 딸려도, 저 처럼 경력이 부족해도, 또 저 처럼 지식과 지혜가 모자라도 열심히 한다면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참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네요.

결국 저는 아직까지는 Work Smart의 왕도를 모르고, 충분히 스스로 smart한 상태도 아니기에 일단은 work hard가 경쟁력일 수 밖에 없는 감사하고도 안타까운 상황이라는 것이 네트워크 고장으로 8시간 동안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잡생각들을 하다 나온 결론입니다. ㅎㅎ

2018년 10월 15일 월요일

벌써 5년... 그 다음 5년을 향해.

요즘 제 삶에 새로운 중장기 목표를 수립하지 못해 다소 목적의식 없이 그저 시간을 흘려 보내던 중, 목표수립 이전까지 잠시 쉬어가는 코너로 수립한 저의 단기 목표가 있습니다.

바로 외발 자전거 타기!

그래서 며칠 전 인터넷 쇼핑을 통해 외발 자전거 한 대를 주문 했습니다.



외발 자전거 타는 법 관련해 구글링을 하다보니 대략 15시간 정도 연습을 하면 어느정도 탈 수 있다고 해서, 눈/비 오는 날이나 어쩌다 연습을 거르는 날 등을 고려해 매일 30분씩 연습하여 올 해 말일까지는 외발 자전거를 타는 것으로 목표를 정해서 연습 중이죠. 물론 이 목표보다는 덜 재미있지만 훨씬 중요한 것은 연말까지 다음 5개년 계획 목표를 수립하는 것이겠지요.

보통 퇴근하고 저녁식사를 마친 후, 일몰 이후에 집 앞 drive way에서 연습을 했는데, 지난 주말에는 한낮에 연습을 했습니다. 여느 때 처럼 열심히 구르고 넘어지고 까지며 연습을 하다 잠시 쉬고있는데, 차량 한 대가 저희 집앞에 멈췄습니다. 뭔가 싶어서 쳐다보니, 아이들이 외발자전거 타는거 보고싶다고 해서 잠시 보려고 멈췄답니다.

저는 이거 며칠 전에 사서 아직 못탄다는 말과 함께 미처 패달이 2바퀴도 돌기 전에 뒤로 나자빠짐을 시연해 보임으로서 제 말이 거짓이 아님을 과감히 증명해 보였죠.

"굳럭!"

이 말을 남기고 그 차는 떠나갔습니다.

욱신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그만둘지, 더 연습할지를 고민하던 찰나,

"띠링"

핸드폰에 알림이 떴습니다. 

구글 포토에서 5년전 오늘 어떤 사진을 찍었는지 알려주는데, 평소에 보이는 아아들 사진이 아닌, 건물 사진 한 장만 달랑 보이네요.


사진을 딱히 좋아하지 않기에 아이들 사진 외에는 잘 찍지도 않는 제가 건물 사진을 찍었다는 것은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캘린더와 당시 저의 SNS를 찾아보니 5년 전 오늘이 한국에서 저의 사표 결재프로세스가 모두 완료되어 퇴직일이 확정이 되었던 날이며, 그간 같이 지냈던 다른 분들께 곧 퇴직한다는 인사를 뿌린 날이더군요.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8년을 보낸 곳이기에 괜시리 센치해져 사업장 밖에서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건물 사진을 남겼던 것 같습니다.

이 날로부터 8년 전, 신입사원 때만 해도 저는 이 회사에서 평생 일을 할 줄 알았습니다. 아니 신입사원 시절까지 시계를 돌리지 않더라도, 그 해 3월에도 제가 이 회사를 떠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죠.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얼마 안되는 것이지만 손에 쥔 것을 놓기 싫어 이직조차 마다했었고 강인한 성품을 지니지 못해 이것 저것 재고 또 비교하면서 타이밍을 놓치기에 도가 튼 제가 부서 이동도 아니고, 한국 내 이직도 아닌 이민을 결정에서 실행까지 단 반년만에 끝내버렸습니다. 4월달부터 시작된 제 커리어에 대한 고민은 5월이 되자 이민으로 변했고, 6월에는 캐나다라는 대상 국가가 확정되었으며, 7-8월에는 이민을 위해 영어 공부했고 9월 IELTS를 3차례 연속으로 치뤘고, 필요한 성적이 나오자 11월에 퇴직을 한 후, 12월에 캐나다로 왔습니다.

이 때엔 

'한창 왕성한 경제활동이 필요한 지금 나이에...'

'혼자도 아닌 처자식을 데리고...'

'집도 절도 없는데...'

'말도 잘 안통하는데...'

'한국에서도 해내지 못했으면서 하물며 캐나다에 가서 5년간 손 놓았던 일을 다시 하는게 맞는 선택이기는 한 것인지...' 

등등 정말 수 많은 고민과 걱정과 근심들로 가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제 삶과 커리어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과 숙제들을 가지고 살지만, 이 때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행복한 고민들 뿐 이군요.

하지만, 이민 고민부터 실행까지 타임라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 때에 저는 충분히 조사하고 준비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다소 무모한 돈키호테식 결정 덕분에 "무식하면 용감"해졌고, 그래서 캐나다까지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저의 성향상, 제가 지금 알고있는 것들을 5년 전에도 알고 있었다면 아마도 그냥 한국에서 계속 직장을 다녔을 것입니다. 
저의 지난 5년은 좋은 기회들과 행운들이 말 그대로 우연히 연속되면서. 자칫 한걸음만 삐끗 해도 떨어질 수 있는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은 이민에서 실력/언어/재력/지식/경험 무엇하나 빼어난 것이 없는 제가 이만큼 전진할 수 있었는데, 이런 우연들이 언제나 찾아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5년 전 계획들이 정말 많은 행운과 우연들로 인해 이뤄졌다면, 다음 5개년 계획들은 더 많은 준비와 노력을 통해 저의 땀으로 이뤄내고 싶습니다. 지금 시도중인 외발자전거 타기는 어쩌면 그 과정 중에는 구르고 넘어지고 깨진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하는 노력은 결국에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제 스스로에게 보여주기 위한 작은 증명이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2018년 10월 8일 월요일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

제가 종종 드나드는 인터넷 카페에 어떤 회원께서 이 속담관련 글을 남기셨는데, 이를 읽고 갑자기 옛 학창시절 추억이 떠올라 제 추억 한자락을 풀어봅니다.

별 것 아닌 일들이긴 하지만 제 인생에 이런저런 영향을 준 사건들이지요.

제가 타임머신을 타고 저의 중고등 학생 시절로 돌아가 그 때의 저에게

"넌 나중에 캐나다에서 살게 될꺼야"

라고 말해 준다면 아마 저는 미래에서 온 저를 거짓말쟁이로 생각하고 하나도 믿지 않았을겁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영어는 완전히 손을 놓고 공부를 하지 않았거든요.
아마 저의 영어실력은 공부를 통해서 보다는 중학생 때 빼먹지 않고 매주 시청한 NBA농구 중계와 (저는 챨스 바클리 팬이였어요), 고등학생 때 매일같이 인터넷에 들어가 읽은 NBA기사들과 (갓 ADSL이 시작한 시기인지라 어마어마하게 느린 속도였기에, 이 때 인내심도 키운듯), 요즘은 거의 한국 방송만 보지만 대학생 때 적게는 서너번 많게는 수십번 씩 돌려본 미드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영어에 손을 놓은 계기는 학교 수업인데, 알파벳 대문자는 알지만 소문자는 전혀 모르고 입학한 중학교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정규교육을 통해 배우는 영어임에도 글자는 가르치지않고 갑자기 문법을 이야기하고, 그나마도 '이런 기본적인건 너희 다 알자나' 하면서 넘기는 모습에 먼저 질렸던 탓이 가장 큽니다. 그래도 그 때엔, 갓 중학생이 된 마당이라 의욕이 넘쳤기에 포기하지 않고 따라가보려 했지만 이에 결정타를 날려 더 이상 영어공부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건이 있는데, 바로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 사건입니다.

당시 영어 선생님은 수업시간 끝날 무렵마다, 숙어나 속담 한 문장씩 알려주며, 다음 수업 시작시간마다 단어 쪽지시험과 함께 이전 시간에 배운 숙어나 속담 시험을 봤는데, 어느 날 이 속담을 알려 준 것입니다.

당시에 선생님은 이 속담위 뜻은 부단히 노력하면 나태해지지 않고, 조약돌처럼 항상 반짝반짝 윤이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설명 하셨습니다.
저는 이 속담을 듣고 떠오른 생각이, 계속 정처없이 떠돌면, 아무런 노하우도 얻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생각이 들었기에 그런 뜻이 아니냐고 물었고, 선생님은 단칼에 아니라고 잘라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수업은 끝이 났고, 저는 교탁으로 쪼로로 달려가 선생님에게 찾아가 그렇게 해석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계속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니다' 라고 한마디 하며 교무실로 향했고, 저는 계속해서 선생님을 쫒아가면서 왜 내가 생각 한 뜻이 될 수는 없는 것인지 물었고 결국 저는 교무실까지 끌려가 그 선생님 책상 앞에 서서 꾸중을 들었죠.

"야, 이끼가 좋아? 이끼가 좋은거냐고! 그게 뭐에 좋은데!" 

다음 수업시작 종이 울릴 때서야 저희 반 담임 선생님이 제가 교무실에서 혼나는 것을 보고 저를 빼내서 교실로 보내줬었죠.

이 사건을 계기로 저는 영어공부와 작별을 고했습니다. (어린시절 저는 정말 멘탈도 약하면서 아이러니하게 고집은 또 엄청 셌어요) 당시엔 완전한 작별이라 생각 했는데, 나중에 캐나다에 오기위해 다시 공부를 했으니, 완전한은 아니였네요. ㅎㅎ

이와 비슷한 사건이 고등학생 때도 있었는데, 그 때엔 국어였습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비극으로 끝나는 단편소설 지문의 마지막에 "여전히 하늘은 푸르렀다" 라는 문장으로 끝이 났었죠.
그 때 이 문장에 대해 제가 부정적으로 해석을 했었는지, 선생님이 부정적으로 해석을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명은 "한 개인이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변화를 시키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대세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해석을 했고, 다른 한 명은 "이렇게 실패했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여전히 푸른 하늘처럼 희망이 있다"는 작가가 던지는 마지막 긍정적 메시지로 해석을 했었죠.
선생님과 몇 번 왈가왈부를 하다가 저는 사진작가를 하시는 작은아버지께서 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진을 찍었다 해도 그 의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 당연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서

"예술은 각자가 해석하기 나름 아닌가요?"

라고 말했고, 선생님께서는

"그래, 그 나름에 따라 네 대입도 결정된다." 

라는 말과 함께 결국 지휘봉으로 머리 한 대를 쥐어박히고 끝이 났습니다.

당시만 해도 정말 혁신적인 '체벌 없는 학교' 였기에 정식 체벌도 아니였고, 반 장난식으로 쥐어박힌 거라 맞은것 자체는 크게 기분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원래도 수학과 물리를 좋아해 이과를 어느정도 염두 해 두긴 했는데, 이 사건 이후 각 문장이나 단어의 뜻 하나하나도 모두 암기를 해야하는 인문계가 너무 싫어 이공계로 진로를 확정을 하게 되었죠. 적어도 고등학생 때 까지 배우는 수학이나 물리에서는 간단한 증명으로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정확한 답이 나오기에 내가 틀려도 얼마든 수긍 가능했고, 내가 맞다면 얼마든 증명이 가능했으며, 작은것 하나하나 외울 필요없이 기본적인 몇가지 툴 만으로도 풀이가 가능했으니까요.

한국의 교육이 나쁘다거나, 당시 선생님들이 잘못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는 학창시절 좋은 은사님들과 인연이 많이 있었고(신기하게도 다 수학/물리 쌤들...), 이민 온 이후에도 한국에 갈 때 마다 찾아뵙는 분들도 계세요. 

당시엔 그 선생님들이 이해도 안가고 솔직히 싫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되었건 제가 더 높은 점수를 얻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고, 또 제가 문학적 클리셰나 그 해석을 뒷받침하는 복선들을 놓쳐서 엉뚱한 이야기를 한 것일 수도 있지요.

교사라는 직업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 당시의 사건들에 대해 그 분들은 아무런 기억이 없을 수도 있지만, 저 처럼 학생 개인에게는 적지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선생님도 선생님이지만, 부모라는 역할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아이에게 던지는 작은 말 한 마디와 생각없이 하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아이에게는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는데, 저는 나름 아이를 걱정해 던진 말들이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하나의 큰 선입견을 심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었던 것 같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아이들과 지난 4일간 같이 시간을 보내고, 글을 읽고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저를 반성해 보는 뜻깊은 롱 위켄드네요.

내일부터 다시 일상이 시작인데, 크리스마스 연휴 때 까지 다시 매일매일이 즐겁고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가 되도록 만들어 나가야겠네요.

그런데...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 이 속담의 올바른 해석은 과연 무엇인가요???

2018년 10월 5일 금요일

한국인이라 행복했던 하루

안녕하세요. 약 2달만에 글을 올리게 되었네요.

분명히 7월 말에 연봉협상을 할 때만 해도 제 마음 속에 다음 한 해의 목표는 일을 조금만 하면서 남들만큼 여유롭게 살고, 기존의 성과는 어느정도 유지를 하는 것이였는데, 작심삼일이라고 벤쿠버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온갖 일들이 터지기도 했고 이것저것 제가 달려들 일들이 생겨버려 바쁘게 정말 바쁘게 살았네요.

어제는 팀 동료와 이야기를 하다가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제가 한국인이라서 행복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 하루였습니다.

첫번째 사건은 약 석달 전 기술이민으로 캐나다에 와서 저희 회사로 입사한 인도 친구와 대화 하면서 생겼습니다.  이 친구는 지난주에 하루 휴가를 내고 G1  라이센스 시험을 봤지만 탈락을 했었죠. 오전에 스프린트 스크럼 미팅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저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옥빌에 driving test는 어때? 미시사가보다 좀 더 편하다는 말이 있던데?"

저는 당연히 한국 면허증을 G1으로 교환했으니 캐나다 라이센스 시험과 절차에 대해서는 1도 모르니, 캐나다 면허시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대답 했습니다. 

"어 그래? 혹시 너 우버타고 다니니 너희 집에서 회사까지 대중교통 없자나."

이 친구 입장에서는 모국의 면허증을 캐나다 면허증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상상도 못했으니 제가 면허가 없다고 생각을 해버린 것이죠. 한국 캐나다간 상호 운전면허증 교환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해주니 정말로 부러워했습니다.

그렇게 제 자리로 돌아와 앉았는데, 갑자기 이 친구가 몇 년 전까지는 미국에 살았다는 것이 기억이 났습니다.

"아, 맞다. 너 근데 미국에 살때 면허 따지 않았어?"

"어 미국 면허 있지."

"그러면 미국 면허를 캐나다 면허로 교환하는 방법을 한 번 찾아봐. 아마 있을꺼야."

"근데 반년 전쯤에 만료됐어. 이럴 줄 알았으면 미국 떠나기 전에 갱신 해두고 떠나는거였는데."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려던 찰나, 다음주가 캐나다 Thanks Giving이라는 것이 생각나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면 만료된 면허 갱신 방법 알아봐. 만료 된 면허라도 비교적 쉽게 갱신 될껄?"

"면허 갱신은 미국 내에서만 될꺼야.?"

"어 당연히 그렇겠지. 그러니까 캐나다 휴일에 미국은 평일이니 다음주 월요일에 잠깐 미국 가면 되자나."

"차라리 시험 서너본 보고말지 언제, 어떻게 미국 비자를 받아"

아... 이 친구가 캐나다 영주권은 있지만, 인도 여권이니 미국에 잠시 간다 하더라도 관광 비자를 별도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잠시 깜빡 했던 것입니다.

한국은 미국 갈때 ESTA 신청은 해도 비자 신청은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해줄까 하다가 너무 부러워 할 것 같아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퇴근을 하려는데, 얼마 전 캐나다 시민권 신청서를 낸 우크라이나 친구가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물어보니 11월 초에 컨퍼런스가 있는데, 메일 확인을 지금에서야 해서 갈 수 없다고 안타까워 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오전에 인도 친구와 에피소드가 있었건만 까맣게 잊고 다시 멍청한 소리를 꺼냈습니다.

"왜? 컨퍼런스 참가신청 마감됐어? 아직 남아있을 수도 있어. 마감이라고 떠도 나중에 다시 열리기도 하고"

"아니, 비자가 필요하자나 한달만에 비자받기 거의 불가능이자나"

"아... 넌 비자가 필요하겠구나..."

"너 벌써 시민권 받았어?"

"아니"

"한국도 미국 갈 때  비자 필요 없어?"

"어. 국경 검사에서 캐나다 여권만큼 쉽게 패스하는건 아니지만, 따로 비자 안받아도 되."

"헐... 넌 그럼 시민권 구지 받을 필요 없겠구나"

"어... 나만 생각하면 그렇긴 한데, 지금 캐나다에서 자라고, 교육받고 있는 아이들 생각하면 또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어. 아마 애들 군대 문제때문에라도 시민권 신청하지 않을까 싶긴 한데..."


한국인들에게는 당연한 일들인지라 별다른 혜택이라고 느끼지도 못하고 지내지만, 가끔 다른 나라 출신 친구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한국인이기에 참 많은 혜택을 받고 산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캐나다에 부모님이 처음 오셨을 때에도 당시 아파트 같은 층에 사는 파키스탄인 가족이 (이미 시민권도 받았고, 캐나다에서 아내는 의사 신랑은 저와같은 SW 개발자입니다) 정말 부러워 했었습니다. 자기들도 몇 번 시도를 해봤지만 부모님 비자가 계속 나오지 않는다고요.

잠시 잊고 살았지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낀 하루였습니다.

2018년 8월 19일 일요일

변하지 않은 벤쿠버, 그리고 변한 나

안녕하세요. 지난 10일동안 벤쿠버와 로키산맥으로 잠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2004년 8월. 날짜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캐나다라는 나라에 첫 발을 내딛었던 때 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군요. 2000년대 초반 IT 버블이 한차례 터지며 홍역을 겪은 후이기는 하지만, IT는 향후 수십년간 대한민국을 먹여살릴 먹거리로 여겨지며 IT 산업과 교육에 투자가 활발했던 시기였고, 정보통신부라는 IT산업 전반에 대해 관장하는 별도의 정부 부처가 있었으며 장관역시 관료나 정치 출신 인물이 아닌 삼성전자 반도체 신화 주역 중 한 명인 진대제 장관이였습니다. 저는 시기를 잘 타고난 덕분에 IT 꿈나무 육성정책의 일환으로 진행했던 정통부 교환장학생 프로그램에 편승하여 벤쿠버의 UBC로 교환학생을 나온 것이 바로 2004년 8월 입니다.

벤쿠버에 도착하여 스카이 트레인을 타고, 미리 예약해 둔 AirBnB에 도착해 짐을 풀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벤쿠버 다운타운 데이비 스트리트에 있는 사무라이라는 일식닥 입니다. 이 집이 맛집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벤쿠버에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갈 식당이였죠.



그 당시 학교 학비는 정통부에서 내줬지만, 생활비는 직접 마련해서 가야했습니다. 그리고 정부에서 학생들을 보내놨는데, 생활비 문제로 행여나 공부는 안하고 알바만 뛰고 다닐까봐인지 정부에서 한 달 생활비를 정해놓고, 총 체류기간만큼 곱하여 해당 금액을 먼저 정통부에 송금을 해 두어야 하는 규정이 있었죠. 생활비 문제는 부모님의 도움과 그간 극강의 꿀알바인 과외를 하며 모아둔 돈으로 해결을 했지만, 살면서 체감 해 보니 정부에서 정한 생활비는 기초생계유지비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였습니다.

첫 달에는 생활비를 잘 알지 못해 흥청망청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많이 경험해 보고자 돈을 썼습니다. 먼저 UBC 학생회관에 가보니 세계 최고의 스키장인 휘슬러 스키장의 시즌패스가 UBC 학생에게는 단돈 $99에 판매되기에 스키 광이였던 저는 시즌패스부터 구입 했습니다. 벤쿠버에서 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이지만, 2시간 정도는 문제가 아니였죠. 그리고 그 시즌패스를 이용하기 위해 중고 스키와 스키 부츠를 샀습니다.(돈을 아끼려고 폴은 사지 않았죠 ㅎㅎ) 또한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음식들도 몇 번 사먹었습니다. 예를들어 그리스 식당 (지금도 영업중이며 다른 지점까지 낸 스테포라는 식당입니다)이나 케이준 스타일, 동남아 식당 등에 가서 식사를 해 보기도 했고, 집 주변에 산책로를 따라가면 너무나도 멋진 스탠리 파크가 있다는 것에 반하여 중고 인라인 스케이트도 구매 했습니다. 또 크리스마스 방학 기간에 맞추어 미국 여행을 계획하고 사전에 항공권과 자동차 렌트, 모텔 예약까지 해 두었죠.
하지만 첫 달 살이를 마치고나자 생활비의 압박이 느껴지기 시작 했습니다. 4명이서 2베드룸 아파트를 렌트하고, 식료품비와 전기, 수도, 인터넷 같은 유틸리티비를 내고나며 남는 돈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미 휘슬러 시즌패스를 사 둔지라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스키장에 왕복을 해야 했는데, 이러다가는 돈이 부족하여 버스를 타지도 못하고 시즌패스를 그냥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래서 첫 달에 3-4번 정도 외식을 한 후로는 외식이라고 해봐야 가끔 정말로 밥을 해먹기 귀찮은 날, 같이사는 친구들과 돈을 모아 중국음식 테이크아웃 식당에 가서 반찬 3-4개 세트를 사와 집에서 밥만 하여 먹거나, 버거킹이나 서브웨이에서 반값 이벤트를 요일에 도시락 대용으로 와퍼나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사먹는 정도였습니다. 또, 스키장으로 가는 그레이하운드 버스 비용 마련을 위해 벤쿠버 translink 먼슬리 패스를 구매하지 않고, 주 2-3회 다운타운 랍슨 스퀘어에서 강의가 있을 때에는 도보로 통학을하고, UBC 본 캠퍼스 강의가 있는 날에는 러닝이나 인라인 스케이트로 통학을 하고, 날이 너무 궂은 경우나 시간이 촉박한 경우에만 버스를 타고 다니며 최대한 고정 지출비용을 줄였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당시 저는 인라인을 타는 것이나 러닝을 참 좋아했습니다. 통학을 하지 않는 주말에도 휘슬러에 가는 날이 아니면 거의 매 번 러닝이나 인라인 스케이팅으로 스탠리 파크를 돌았으니까요. 또 식사 역시 제가 요리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주 먹은 대부분의 한식 요리들은 대략의 눈대중으로 흉내를 내서 꽤 먹을만한 정도의 맛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요리의 한계가 찾아오는 분야가 있었으니, 제가 평소에 즐겨먹지 않는 음식인 튀김이나 부침요리 분야였습니다. 평소에 자주 먹어본 경험이 없다보니 요리를 해 보려 해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하는지 부터 전혀 몰랐던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튀김을 좋아하는 친구 중 한 명이 어디서 들었는지 데이비에 있는 사무라이라는 식당에 가면 모듬튀김이 있는데, 양이 푸짐하게 나와 4명이 먹을만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두들 주머니 사정에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외국에 나와 살면서 한 번쯤은 패스트푸드 외에 현지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사무라이라는 곳에 한 번 가보게 됩니다.

지금에서 들게 된 생각인데, 모듬 튀김을 메인 요리로 시켜서 식사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고, 4명이 먹기에 충분하게 푸짐한 양이라는 말은 4명이 각자 자기 dish를 먹으면서 튀김 한 접시를 시켜 같이 share하여 먹기에 충분하다는 말이였을 것 같습니다. 결국 그렇게 방문한 사무라이에서 저희는 온갖 빛깔의 화려한 롤과 스시, 사시미와 우동, 라멘 등 각종 일식 요리들을 테이블 너머로 구경만 하고 튀김 몇 조각 씩 맛만 본 후 집으로 돌아와 다시 밥을 해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10여년이 흘러 캐나다에 이민을 오면서 어느 순간엔가 자연스럽게 생겨난 저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는 사무라이에 가서 먹고싶은 메뉴들을 다 시켜먹고 싶다는 것이였고, 이번 여행에서 그 버킷 리스트를 실현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일단 튀김은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넷이서 왔던 식당에 이제는 가족들과 넷이서 다시 방문하게 되었고, 그때와는 달리 먹고싶은 것은 무엇이든 주문 할 정도의 재력을 가진 지금의 모습에 괜시리 감수성이 폭발할까봐 다른 음식들을 주문했습니다.
아이가 커리카츠와 연어 데리야키 둘다 먹고싶은데 그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했을때, 다른 날 같으면 기회비용 선택도 훈련이 필요하니 직접 선택하라고 할텐데, 그 날 만큼은 둘 다 시키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동, 가라아게, 롤, 스시, 커리카츠, 연어구이, 치라시 등등 어른 둘, 아이 둘 총 네명이서 먹기에 버거울 정도로 많이 먹었습니다.








그렇게 배를 채운 후에는 소화도 시킬겸 데이비 스트리트에서 좀 더 서쪽으로 나와 비치 에비뉴로 향했습니다. 해변가 길을 따라 산책을 하기 위해서요. 제가 살던 집 주변이기에 길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죠.

14년만에 다시 찾은 벤쿠버는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해변가 산책로에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러닝, 워킹을 하는 모습이였습니다. 제 아이들도 14년 전 제가 그랬듯 뻘로 나가 조개껍질도 줍고 파도에 발을 담그며 즐겁게 놀았습니다.

비치 에비뉴를 따라 걷다가 다시 만난 제가 살았던 아파트 역시 제가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 서 있었고요.

그 길을따라 스탠리 파크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다보니 예전에 보았던 돌탑들 역시 아직도 많이 보였습니다. 다만, 그 때 거의 매일 봤던 돌탑을 쌓던 할아버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도 할아버지였는데... 14년이 지났으니... 아마도...



숙소로 돌아오기위해 다시 다운타운 쪽을 향해 가다보니 데이비 스트리트는 여전히 무지개 빛깔로 곳곳이 물들어있었고, 길가에는 다양한 상점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랜빌 아일랜드에 들러보니 여전히 여름철 주말을 즐기기 위해 나온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버스킹을 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나들이객들을 위한 많은 음식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숙소로 다시 돌아가며 그랜빌 스트리트를 지나는데, 예나지금이나 거리 곳곳에 지린내가 진동하며 비바람 피하기 좋은 목에는 홈리스들이 여지없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랍슨 스트리트는 14년 전에도 벤쿠버가 아닌 이태원 같다고 많이들 이야기 했는데, 당시엔 제가 한식당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였는지 몰라도 다시찾은 랍슨 스트리트에는 전보다 더 많은 한식당들이 있었고, 식사 시간에는 심지어 손님들이 몰려와 1-2시간씩 기다려야만 입장이 가능한 곳도 많이 있었습니다.

벤쿠버는 크게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변한 것이라면 제가 재력이 좀 생겼다는 점 같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먹고싶은 음식이 있다면 돈 걱정없이 먹을 수 있으니까요. 또, 그 때엔 저 혼자였지만 지금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있으며, 또 그 뒤로는 아들 둘이 있고, 그 때에 저에게 캐나다란 그냥 외국 중 하나였을 뿐이며 교환학생을 위해 잠시 머무는 나라일 뿐이였지만 지금 저에게는 내가 살고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나라라는 것이 달라졌넨요.

처음 며칠간 벤쿠버에 지내며 14년 전 제가 그랬던 것 처럼 걸어서 다운타운 곳곳을 둘러보았는데, 예전보다 차이나타운 쪽에 고층 건물들이 더 많이 들어선 것 외에는 크게 변한것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변해버린 저로 인해 다른 점들이 여러가지 있었습니다.

예전에 저는 주택가 보다는 벤쿠버 다운타운이 좋았습니다.
곳곳에서 피어나는 담배연기, 대마초 냄새와 언제 어디서나 보이는 수많은 홈리스들, 항상 풍겨오는 지린내들과 취객들과 자동차의 소음이 있지만, 3면 어디를 가도 가까운 해변가 산책로와 너무나도 멋진 스탠리 파크, 그리고 주로 수업이 진행되는 랍슨 스퀘어와 도보로 통학이 가능했고, 스키장으로 가는 그레이하운드 버스 정거장도 가까웠기에 다운타운이 좋았습니다. 

사실 이민을 오면서 벤쿠버로 가지 않은 이유에는 그러한 저의 기억과 경험이 큰 영향을 준 것 같기도 합니다. 버스패스 없이 생활했기에 UBC외에 벤쿠버 다운타운을 벗어난 적이 없어 실제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주택가의 모습이 제 기억에는 없었고, 제가 기억하는 그러한 벤쿠버의 모습은 아이들과 함께 가족이 생활하기에는 부적절한 곳이였습니다.

다시 찾은 벤쿠버 다운타운에서 저는 제 생각이 옳았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택시나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을 벗어나 주변에 다른 동네들을 둘러보니 벤쿠버에 살았어도 장단점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벤쿠버의 스카이트레인이 부러웠습니다. 토론토에서 총 3개의 지하철 노선이 있지만, 토론토 내에서만 연결이되지, 쏜힐이나, 리치몬드 힐, 마컴, 미시사가, 본, 옥빌, 벌링턴 등 주변 도시들과는 전혀 연결이되지 않습니다. 버스 또한 각 도시별로 각기 다른 회사에서 운영되기에 환승연결 등이 되지 않아 비용도 두배가 들어가죠. 반면 벤쿠버는 모두 translink였고, 하나의 day pass로도 모두 방문이 가능했기에 정말 편리했습니다.

또 벤쿠버의 식당 세금이 부러웠습니다. 기본 가격은 토론토보다 아주 조금 비싼 편이였지만, 식당 음식에 주정부 세금이 부과되지 않다보니 총 가격은 토론토보다 조금 저렴하거나 비슷했습니다. 또한, 토론토보다는 보다 관광지의 성격이 짖어서인지 몰라도 음식과 서비스의 퀄리티가 훌륭했죠. 특히나 해산물에 있어서는 내륙에 위치한 토론토와 해안가에 위치한 벤쿠버는 에 퀄리티와 가격 모두 전혀 비교대상이 아니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버나비에 있는 Sushi Garden이라는 한인 스시 가게입니다. 총 3개의 지점이 있는 식당인데, 가면 우선 이름을 말하고 기다려야 하고, 순서가 되어도 한 명이라도 부재중이면 자리 배석을 안해주고 순서가 밀릴 정도로 인기있는 곳이였죠. 연어 스시에 저 꼬리 내려오는 것 보이시나요? 토론토에서는 고급 일식당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이 가게의 음식 가격은 일반 중급 일식당 가격임에도 이러합니다. 사시미 역시 토론토에서는 깍두기 크기로 나온다면, 벤쿠버에서는 석박지 크기로 나왔습니다. 중급 스시 가격에 고급진 맛과 퀄리티에 많은 양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벤쿠버였습니다.




식당 뿐 아니라 상권 전반적으로 아시아의 영향이 큰 벤쿠버의 상권이 부러웠습니다. 농담으로 UBC를 University of Billion Chineses라고 할 정도로 벤쿠버와 그 인근에는 다수의 아시안이 거주합니다. 그렇다보니 식당 뿐 아니라 제과점, 의류, 화장품, 생필품 등 다양한 카테고리에서 아시아인을 타깃으로 한 상점들이 토론토보다 훨씬 많이 보였습니다. 이게 별 것 아닌것 같아도 실제 이민생활을 하다보면 조금씩 조금씩 세세하게 불편한 점 중 하나입니다. 특히나 한국인 사이에서도 덩치가 작은 분이라면 아시아인 인구가 적은 도시에서는 옷이나 신발 하나를 사려고 해도 몸에 맞는 사이즈를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할 정도로 힘이 들기도 한데, 벤쿠버의 상점은 아시아인을 배려하는 제품들이 더 많았으며, 아시아권의 유명 생필품/의류/화장품 브랜드들이 토론토에 비해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한식 식당들도 토론토에 비하면 부러웠습니다.
제가 맛집들만 찾아 돌아다닌 것도 있지만, 확실히 토론토 주변의 한식 맛집들과 비교를 하여도 벤쿠버의 한식당들은 토론토의 그것들에 비해 손님이 더 많았으며 (수십분에서 1시간 대기는 일상이였습니다), 한국인과 중국인을 제외한 다른 민족의 손님 비율이 훨씬 높았고, 테이블 수에 맞는 적절한 서버가 있어 서비스의 퀄리티도 좋았습니다.

토론토와 그 인근의 한식당을 가보면 항상 아쉬운 점들이 몇가지가 있는데, 서비스와 가격대가 그 중 하나입니다. 보통 한식당에는 다른 식당에 비해 서버의 수가 테이블 수에 비해 적습니다. 식사 하나를 하더라도 최소 대여섯 가지의 반찬이 같이 나오는 한식은 서버가 할 일이 다른 음식에 비해 오히려 더 많습니다. 비슷한 가격대의 비슷한 종류의 음식인 스테이크와 갈비를 비교하더라도 스테이크는 접시 하나가 나오면 되지만 Korean BBQ는 고기를 구우면서 중간중간 숯불을 갈아주거나 불판을 갈아야 하는 등 손이 더 많이 갑니다. 하지만 보통의 한식당들을 보면 테이블 수 대비 서버의 수가 부족합니다. 다른 식당들에서는 서버가 어느 한 구석에 서서 자신이 담당하는 테이블들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필요한 것이 있는지 미리 확인하지만, 한식당의 경우 일손이 부족하다보니 손님이 능동적으로 벨을 누르거나 불러서 서버를 찾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벤쿠버의 한식당들은 대부분 다른 식당들 만큼이나 서버의 수가 충분했고, 그래서 토론토에 비해 서비스가 좋았습니다.

음식 자체도 제가 요리를 해보면 한식의 경우 반찬들 때문에 다른 음식에 비해 손이 조금 더 많이 갑니다. 식재료 역시 캐나다 현지에서 구하기 쉬운 것은 아닌지라 재료비 역시 조금 더 비싸고요. 하지만 한식당의 식사 가격은 쌀국수 같이 저렴한 몇몇 음식을 제외하면 다른 음식들에 비해 저렴한 편입니다. 재료비는 더 비싼데 가격은 오히려 더 저렴하다면 결국 직원 임금을 줄이거나, 퀄리티가 낮은 재료를 쓰거나, 점주의 마진을 최소화 시켜야만 한다는 이야기인데, 어느 쪽이건 내가 먹는 음식과 내가 받는 서비스가 나빠지거나, 한인사회 전반에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나빠진다는 이야기인지라 좋은 것은 아니죠.

다만 식당에 있어서 조금 아쉬운 점은 토론토에서는 좀처럼 경험하지 못한 대기시간 이였습니다. 토론토의 한식당은 맛집이라 해도 보통 한국인과 중국인 정도만 이용을 하기에 테이블에 앉을때 까지 대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있다 해도 10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벤쿠버의 한식당에서는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이용을 해서인지 짧게는 30분, 길게는 2시간까지 대기를 해야만 먹을 수 있었네요.

또한 바다와 산을 끼고 있는 지형이 부러웠습니다.
온타리오에 없는 것이 두가지 있다면 바로 바다와 산 입니다. 벤쿠버는 바다와 산을 모두 끼고있기에 다양한 자연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으며, 산악 트래킹과 해양 스포츠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비록 지린내와 대마초 냄새, 담배연기가 넘쳐나긴 하지만 따뜻한 분위기의 상점들이 넘쳐나는 다운타운이 부러웠습니다. 이것은 토론토에 이민와서 처음 느낀 것인데, 토론토의 다운타운은 조금 차갑고 메마른 느낌입니다. 아무래도 토론토는 금융과 산업의 중심지인지라 다운타운에 가더라도 고층 빌딩들만 즐비해 있으며, 그 고층빌딩에는 온갖 회사와 은행들이 자리하고 있지만, 벤쿠버의 다운타운에는 단층이나 저층 건물들이 있으며 그 건물의 1층에는 다양한 식당들과 상점들이 지나가는 행인을 맞이합니다.

이민 목적은 아니였지만, 캐나다에서 첫 발을 내딛었던 땅이였기에 지금은 제가 살지 않는 낯선 땅임에도 왠지 모르게 고향같은 친숙함이 있던 벤쿠버. 이번 방문을 계기로 친숙함에 친근감까지 더해진 것 같네요. 이번 여행 전만 하여도 설령 벤쿠버에서 저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job offer를 준다 하여도 이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지금은 그런 일이 생긴다면 진지하게 고민하고 아내와 상의를 해 볼 만큼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오래간만에 찾은 벤쿠버에서 원없이 이것 저것을 먹고 즐기다보니 저 뿐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허리둘레가 눈에띄게 증가했네요. 다음 주 부터 일상으로 복귀가 시작되면, 다이어트도 같이 병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ㅎㅎㅎ


2018년 7월 28일 토요일

캐나다에서 만난 통곡의 벽, 하지만 목표달성!!!

안녕하세요.

오늘은 며칠 전에 마무리 연봉 근무조건 협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일전에 다른 글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제가 다니고있는 회사는  회계년도 2019년이 이미 시작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회사는 개인의 업무성과와 그에따른 보상에 대한 협상이 calendar year 아닌 fiscal year 맞춰 이뤄지기에 연말이 아닌 연중에 이렇게 평가와 협상이 이루어지죠.

예전 글에서 말씀드렸던 저의 연봉협상에 대한 전략을 간단히 되짚어보자면 일단 지난 1년간 정말로 일을 했어야하고, 다음은 특히 협상기간 직전, 회계년도 막바지에 강한 임팩트가 있을만한 것들을 터트려주는게 더욱 좋으며, 보상을 받을만한 충분한 성과가 있었다면 미리 supervisor에게 정보를 흘려 내가 원하는 보상을 어느정도 눈치챌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전략은 실제 내가 일보다 보상을 이끌어낼 수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내가 만큼의 보상을 받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해엔 저희팀 매니져가 계속 공석이였고, 위에 2단계의 보고체계도 비어있다보니 조직도상 저의 직속상관이 한동안은 회사 창업자 CEO였고, 조직 구성이 다소 변경 이후에도 제품개발 전체 책임자인 부사장이 직속상관이였습니다.
부사장과는 조직이 변경되었을 5-10 정도 서로 인사한 것이 전부였으며, 이전에는 이름도 몰랐던 사람이기에 제가 지난 1년간 어떤 일을 얼마나 어떻게 왔는지 도무지 없는 것이 자명했는데, 연봉협상을 앞두고 저는 점이 상당히 불편했죠. 딱히 인상이나 변경요인이 없었다면 모를까, 지난 1 정도는 능력의 한계 내에서 최대한을 짜내어 많은 일들을 해왔고, 기간동안 적어도 저희 내에서 가장 많은 일을 수행 왔기에, 저는 그에따른 적절한 보상이 이뤄지기를 바랬으니까요. 어차피 연봉은 오르더라도 절반은 세금으로 떨어져 나가고, 예전처럼 20, 30% 인상을 만큼의 룸도 없기에 크게 바라지 않았지만, 휴가만은 어떻게 해서라도 크게 늘리고 싶었죠.


대략 3-4 경부터 때면 짧게나마 생각을 해보기 시작 했습니다. 회사 내에 HR이나 다른 개발 부서 VP들과 이야기 때면 저희 부서의 조직이 어떻게 것인지 물어보며 안테나를 세우고 다니기도 했고요.

그러다 석달 전에 내년도 부서 비용관련 일부 내역에 대해 제가 자료를 만들어야 일이 생겼습니다. 원래 매니져가 일이지만 매니져는 공석이고 조직도상 매니져인 부사장이 개발부서의 상황을 아는 것도 아니다보니 어쩔 없이 제가 일부를 했었습니다공식적으로는 저희 매니져인 부사장의 명의로 재무팀에 요청이 나가는 것이기에 부사장의 컨펌이 필요했고, 그래서 저는 기회에 이런저런 것들을 이야기 보고자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쉽지가 않았습니다. 메일을 보내도 읽는지 안읽는지 모르겠지만 답장이 없었고, 사무실에 찾아가도 항상 자리에 없었죠. 나중에 1주일 정도 후에 알게 사실인데 당시 2 가량 인도연구소에서 근무 중이였습니다. 부사장이 제품개발부서 전체 책임자이기에 인도와 캐나다 양국을 오가며 근무를 하고 있다더군요. 그래서 HR 통해 출장기간을 확인한 본사 근무일에 맞춰 사무실에 찾아가 보았지만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결국 나중에 다른 개발팀 VP 통해 연락이 되어 부사장이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발팀 매니져와 VP 검토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고, 재무팀에는 무리없이 기한 내에 관련 자료를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어찌보면 개인적으로는 부서 클라우드 서비스 예산보다 중요한 개인면담을 기회를 놓친것이 너무 아쉬웠죠.


부사장에게 따로 연락을 하여 적어도 휴가일수 증가에 대한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풀어볼까도 싶었지만, 다른 동료가 이미 전부터 부사장에게 면담 요청을 했지만 한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있기에 방법은 일찌감치 포기를 했고요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다가 평가 면담일에 그냥 부딛칠 수도 없는 노릇이였습니다저는 더욱 휴가일수가 너무나도 간절한 상태였기에, 그에대한 /부를 확실히 일고싶었고, 그에 따라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미리 시작하고 싶었으니까요.

그러다 전에 전년도 고과평가 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360 평가라고 하여 매니져는 다른 유관부서 직원에게 특정 팀원에 대해 평가를 요청할 있는 시스템이 있는데, 저도 다른 매니져의 요청을 받아 팀의 팀원 명을 평가한 적이 있었죠부사장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혀 알지 못하는 자신의 직속 팀원들을 직접 평가하기보다는 평소보다 많은 수의 360평가를 수행해 얻은 피드백들을 조합해 고과 산정을 같았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니였지만,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사다리타기 식으로 고과를 주는 보다는 분명 나은 방법이니 그럴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그래서 부터 저는 다시 신발끈을 조였습니다. 공식적으로 6-7월달은 금번 업무평가 대상기간이 아닌 내년도 평가에 포함되는 기간이지만, 6월달부터 고과평가 시스템이 열려 각 개인별 평가갘 시작되니 지금이라도 360 평가에 대비를 하면 가능할 같았습니다.

저희 부서의 업무는 자체적인 목표에 따른 개발업무가 1/3, 다른 모든 개발부서에서 요청하여 개발하는 업무가 1/3, 나머지는 기존 서비스와 인프라스트럭쳐에 대한 유지보수나 개선 업무입니다.
일의 재미로 보자면 자체적인 needs 목표에 따라 하는 일이 가장 재미있습니다. 부서의 요청에 따른 개발의 경우, 개발환경이나 관련분야 지식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구조나 설계에 대해 상호간 이해가 달라 다툼도 잦은 편이고, 때로는 사용하는 기술 스택이 정말 지루하기 짝이없고 정말 흥미가 안가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일을 때에 자체적인 needs 가진 일들을 서로 맡고싶어합니다.
하지만 360 평가를 고려한다면 외부 요청 대응 업무는 상당히 매력적인 업무입니다. 그래서 저는 최대한 적극적으로 관련 업무들을 저에게 할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는 종류 아니라 방식에도 살짝 변화를 줬습니다.
포함 저희 팀원 4명은 전체 수백명의 개발자들의 요청을 모두 처리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시스템에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기본 설계나 개발 프로세스에 문제가 경우에 저희는 best practices 모아놓은 템플릿 문서들을 보내주고, 이러한 형태로 기존 프로세스와 코드 구조와 설계가 변경되지 않으면 요청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답변을 보내곤 합니다. 각각의 케이스들을 깊게 살펴보고 맞춤형의 피드백을 있다면 좋겠지만, 기본적인 이해가 아직 부족한 팀에게 A-Z까지 모두 설명하고 살득시키기에는 저희 인력이 너무나도 부족했으니까요.
하지만 6월부터 저는 이상적인 형태의 업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청사항에 대해 거절을 하더라도, 그들의 현재 코드와 설계, 프로세스 등을 하나하나씩 분석하고 찾아낸 문제점들을 정리해 각각의 문제점들에 대해 best practices 매칭을 시켜주거나, 없는경우 제가 생각할 있는 최대한의 개선책을 구체적으로 제안 했습니다. 정말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하여 저의 제안에 대해 '지금 도는데 구지 바꿔?' 라며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에는 파일럿 형태로 제가 임의로 그들의 프로젝트를 개선하여 직접 개선 효과를 보여주기도 했고요그렇다보니 외부 요청에 의한 업무에 소요되는 시간이 이전 대비 증가했습니다. 그렇다고 시간부족으로 원래 계획한 업무들 뒤로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올해 번아웃 이후 하지 않았던 야근도 다시 시작했고, 주말에도 집에서 책상에 앉아 일을 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나마 조금이라도 제가 흥미가 있던 주제들이 많이 있었기에 재미있게 있었고, 이해가 부족하거나 잘못된 설계를 했던 팀들이지만 덮어놓고 변화에 반대하지않고, 저의 제안들을 경청해주는 상대들을 만났기에 지치지 않고 일을 있었죠.

그러다 3 , 여느 처럼 집에와서 계속 일을하고있는 금요일 늦은 밤에 부사장에게 메일이 왔습니다.

"
다음 주에 30 정도 잠깐 이야기 있겠니?"

드디어 고과면담이 잡힌다고 생각한 저는 언제 언제를 제외한 모든 시간에 가능하다며 곧바로 회신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월요일 밤까지 아무런 추가 회신이 없기에, 휴가에 마음이 급했던 저는 다시 메일을 보냈습니다.

"
네가 스케쥴링 하기엔 바쁜것 같으니 내가 해도 될까? 일정표에 시간 아무때나 잡으면 되니? 장소는 사무실로 하면 되지? 혹시 네가 괜찮은 시간대나 요일이 있으면 알려줘."

그리고 며칠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회신도 없었죠. 그래서 메신져를 통해 quick chat 요청건 관련 내가 답장을 보냈으니 확인 달라고 메시지를 남겼지만 마찬가지로 아무런 답이 없었습니다. 다음주가 되어 HR 통해 알게 일인데, 부사장은 이미 인도에 다시 나가있었습니다. 저에게 메일을 냈던 토요일에 비행기를 탔다고 하고, 일정상 2 후에나 본사 출근을 한다더군요.

"
뭐지? 인도에 있을꺼면서 그런 메일을 보냈을까?"
미스터리 메일을 뒤로한 다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지난 금요일, 부사장에게 다시 메일이 왔습니다.

" 지금 인도에 있는데 내일 캐나다로 간다. 주말에 고과평가 미팅을 잡을테니 다음주에 보자."
그리고 일요일에 미팅 초대 메일을 받고, 이번 수요일에 고과평가 미팅을 하며 서류상 저의 매니져를 두번째로 만나볼 있었습니다.
고과평가에 대한 저의 우려를 알았는지 그는 시작부터 이번 평가의 어려움에 대해 일장 연설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평가를 수가 없었기에 다른 개발 매니져들에게 평가를 요청한 이를 취합해 평가에 반영했다며, 저의 self evaluation 대한 피드백은 모두 비워둘 것이며 평가 점수만 준다고 했습니다. 저의 지난 1년에 대해 무엇을 잘했고 무엇이 부족했는지에대해 객관적인 평을 들을 없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예상대로 360 평가를 했다는 점에서는 좋았습니다. 일장연설이 조금 지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이번 평가의 어려움의 근본 원인과 문제로 저를 지목하기 시작합니다.

"평가를 하려면 너를 알아야하고, 네가 일을 알아야하고, 네가 일이 얼마나 것인지 알아야하는데, 너는 내가 너를 있는 기회를 전혀 만들지 않았어. 360 평가를 보니 지난 1년간 정말 일을 같은데, 너의 이런 자세는 문제야.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self evaluation에서 크게 조정을 하지 않았지만, 나와의 관계를 소홀히 했다는 때문에 관련 항목들은 내가 조정을 했어.


??? ......?

평가는 자발성, 창의성, customer-oriented, 적극성 등등 여러 항목별로 평가가 이루어지는데, 저의 고과권자인 자신에게 어필을 게을리한 것에 대한 책임으로 적극성, 책임감, company culture, 자발성 등등 개의 항목의 점수는 "Need to improve" 평가를 하겠답니다.

"내가 바빠서 네가 나를 못만난 것일 수도 있는데, supervisor 누군지 아니? 그래, 우리회사 사장이야. 그는 나보다 15배는 바쁜 사람이야. 내가 어떻게든 그를 찾아가고, 기다리고, 쫒아가서 만나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아마 나랑 1 내내 얼굴도 못볼 수도 있어. 그래서 나는 사람 출장가면 공항에 쫒아가기도 하고, 비서에게 연락해서 일정 확인해 잠깐 사무실에 돌아올 때에 맞춰 기다리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해서 나를 알리고 우리 제품 개발팀을 알리지. 그런데 나에게 너를 알리기 위해서 무엇을 했니?"
... 속으로 정말 많은 말들이 떠올랐지만, 그와 지금까지 이야기하며 느낀 것은 본인 스스로 틀린 것을 알면서 우긴다기 보다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느껴졌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너는 부사장이기도 하지만, 우리 팀의 매니져고, 우리를 알고 이해하고 관리하고 평가해야 하는 것이 너의 롤인데, 롤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니?' 라는 말을 수백번 했지만, 저와는 완전히 다른 마인드 셋을 가진 벽이라 느껴졌기에 부분적으로는 인정을 한다고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서 3주전에 왔었던 미스터리 메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예를 들어서 내가 지난번에 30 정도 이야기 있겠냐고 메일을 보냈는데, 아무런 피드백도 없었어. 이것은 너의 책임감과 company culture 대한 자세가 발전해야한다는 이야기이지."

"아니야. 네가 금요일 밤에 메일 보냈을때, 바로 답장을 했고, 이후에 아무런 피드백이 없기에 다시 추가로 메일도 보냈고 메시지도 보냈어."

" 그런 메일 받은 없는데?"

"메일 열어봐. 분명히 보냈어. 아니면 폰에서 내가 보낸 메일 보여줄까?"

"좋아, 그러면 메일을 보자. 메일에 읽지않은 메일이 4천개가 있어. 말이 맞다면 중에 네가 보낸 메일이 있겠지. 만약 없다면 실수를 한거야. 어디보자... , 네가 보낸 메일을 내가 읽지 않았구나."

"그래 내가 회신 했다니까."

"그런데, 내가 30분정도 이야기 하자고 했는데, 이에 대해서 너는 네가 가능한 시간만 알려주고 끝났자나. 이건 바람직하지 않아. 적극성이 결여되어있다는 말이지. 만약 내가 이런 식으로 일을 했다면 사장은 나를 진작 짤랐을꺼야. 내가 말했자나. 사장은 나보다 15배는 바쁜 사람이라니까. 메일에 이런 식으로 답장을 하면 안되고, 네가 직접 스케쥴링을 하거나, 내가 메일을 보낸 후에 나에게 찾아 왔어야지."

"그래서 다음에 메일 보냈어. 내가 스케쥴링 하겠다고. 그런데 메일에도 답이 없었어. 그래서 Team 메신져로 메시지도 보냈고, 메시지에도 답이 없었어. 여기 찾아오기도 했는데 항상 없더라고. 그래서 알아보니 인도에 출장갔다고 하더라고"

"정말? 그럼 확인해 볼까? ... 그렇군. 메일을 보냈구나. Team 메신져 안써서 그건 모르겠고. 그러면 Need to improve 아니고 satisfied 바꿀께. 네가 처음부터 직접 스케쥴링을 하고, 나를 찾아왔어야하지만, 뒤늦게라도 그렇게 점은 인정 할께."
사실... 인도에 출장가면서 이런 말도안된 메일을 보낸 저의가 무엇인지도 따지고 싶었고 스태프 조직 멤버도 아닌 개발자가 이런 식으로 윗사람 쫒아다니면서 만나야한다는 말도안되는 이야기도 따지고 싶었지만 이미 상대는 자신만의 세계관이 확고하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꼈기에 이상 파고들지는 않았습니다.

"... 그래. 우리 자주 만나자... 최대한..."

"그래. 얼마 전에 매니져 명을 채용해서 너희 팀에 것이고 앞으로는 사람과 일을 하겠지만, 그래도 이것은 아주 중요한거야. 앞으로 나를 자주 찾아오려고 노력해봐. 나한테 연락을 한다고 해도 내가 그것을 일일히 확인 본다거나, 연락을 받을 있는 것은 아니야. 아주 바쁘거든. 그래도 네가 어떻게든 나를 만나려고 노력을 해야해"

"... 그래..."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년도 저의 compensation 조정에 대한 자신의 오퍼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이미 만리장성보다 거대한 벽이라 느껴졌기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고, 다만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휴가를 늘릴 있을지 고민만 가득했습니다. 심지어 지금보다 연봉을 조금 깎더라도 휴가를 달라고 해야 지도 생각 봤고요.
하지만 지금까지 벽과 이야기했던 느낌과는 달리 오퍼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예상이나 기대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전부터는 예전처럼 자릿 수의 % 인상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는데, 보너스까지 포함하면 10% 이상이였죠. 부터 다시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 휴가는? 휴가 이야기는 어떻게 꺼내지? 오퍼는 고맙지만 돈은 조금 올리더라도 휴가 왕창 달라고 해야하나? 아님 그냥 휴가 이야기를 꺼내?

"... 어째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다? 정도에 만족을 못하는거야? 이상은 안되. 나같으면 오늘 집에가서 와이프랑 파티 같은데?"

"아니야. 지금 문을 열고 나가면 나도 와이프에게 오늘 파티하자고 메시지 보낼꺼야."

"그러면 만족 한거지? 오케이? 그럼 ?"

". 그런데 한가지... 내가 전부터 이야기했던 것인데, 한번도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적도 없지만 최종 승인을 받은 적도 없는거야. 정말로 많은 휴가가 필요해. 휴가 1주일이라도 늘리고 싶어. 지금 상태라면 내가 언제 번아웃되어도 이상할게 없어. 경력에서 지금만큼 휴가가 짧았던 적이 한번도 없거든."
정말로 그랬습니다. 특히 올해엔 언제 번아웃이 와도 이상 것이 전혀 없었기에 저는 충전을 위한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으니까요. 예상외의 인상 폭이였기에 보너스나 연봉 인상분의 일부를 포기하더라도 휴가를 받아내고 싶었습니다.

"오케이. 그러면 나한테 메일 보내줘. 메일 제목에 [Important]라고 태깅해서."
아직 HR 최종 승인까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다행히 부사장은 휴가에 대해서도 요구대로 처리를 주었고, 어찌되었건 제가 목표 바는 모두 이룰 있을것 같습니다.
캐나다 회사에서 일을 하며 기술적인 고집이나 아집을 가진 사람과 이야기하며 벽을 만난 같은 느낌이 들었던 적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정말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마인드 셋으로 무장된 이런 벽은 처음 만나봤습니다.


연봉협상 다음 다른 팀원들과 이야기 하면서 알게 것인데,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부사장에게 똑같은 미스터리 이메일을 받았었고, 똑같이 자신의 답장에 대해 아무런 피드백도 받지 못했으며, 똑같이 고과평가 적극성, 자발성 등등이 부족하다는 지적 등을 받았다고 하네요. 그들 일부는 그러한 부사장의 의견에 강하게 반발하여 고과평가 미팅을 2시간 넘게 끌고가며 논쟁을 펼친 친구도 있습니다. 20 초반의 젊은 친구인데, 역시도 친구의 의견에는 격하게 공감을 하지만, 너무 거대하고 단단한 벽을 만났을 때에는 부수려 들기 보다는 그냥 돌아가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는 저의 꼰대 생각을 전해줬습니다.


휴가를 늘리기위해 6월달부터 지속해 왔던 야근과 주말 근무가 처음 목표했던 휴가 아니라 돈까지 올려주면서 다른 행복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지금 오른 연봉이 적정한 수준의 노동을 하며 얻은 성과이기 보다는 다소 무리해서 피땀을 흘려서 얻은 결과이기에 저의 자산이기 보다는 부채라는 느낌이 강한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지난 1년간 노력한 결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기는 하지만, 연봉에 따른 성과를 못내면 연봉을 깎기 보다는 해고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지금처럼 숨가쁘게 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저의 체력과 열정이 조금씩 사그라들 때엔 자칫 잘못하면 저의 발목을 잡아채는 족쇄처럼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도 일단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나 걱정을 하기 보다는 지난 1년간 저의 노력이 인정받았다는 것에 만족하고 즐겨야겠죠. 연봉 인상이라는 회사원의 마약을 다시 받았으니, 약빤 기분으로 다시 신나게 일을 해야겠죠.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저도 제가 부러워하는 '총기'라는 것이 조금 생겨서 짧은 시간을 일하면서 지금 수준의, 아니면 지금보다 나은 성과를 얻는 날이 있다고 믿으며 이번 주말을 즐겨보려 합니다.